# 함정 # 악연
나는 늘 노동한 만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어른들의 "쉽게 번 돈은 쉽게 없어진다"는 말을 깊이 새기며, 재테크에 대한 자신감 부족 때문인지 큰 욕심 없이 살아왔다. 결혼 후 23년 동안 재테크는 우리 부부의 삶에 없었다. 맞벌이로 번 돈을 저축하고, 아이들 학원비와 생활비로 쓰며, 해외여행도 즐기는 나름의 만족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다니던 산책길에서 남편과 함께 근처 부동산에 들렀다. 부동산 사장님은 반갑게 맞아주며 뜬금없이 물었다.
"부자가 되고 싶으세요?"
당황스러운 질문에 웃음만 나왔다.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다, 혹시 재건축 상가 중 괜찮은 물건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소유한 상가를 권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사세요. 재건축되면 대박입니다.” 학군 좋고 입지도 훌륭한 동네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순간적으로 ‘이건 신이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큰 금액이었지만 월세로 대출 이자를 갚을 수 있다는 계산이 섰고, 동생에게도 입지가 너무 좋으니 동참을 제안했다. 그러나 경험 없는 우리에게 이는 지나친 낙관이었다.
며칠 뒤, 운동 후 라커룸에서 센터 언니에게 상가 얘기를 꺼냈다.
"언니, 00동 상가 매수하려고 해요." 언니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 상가 얼마인데?"
센터 언니는 금액에 놀라고, 상가 이름을 듣고는 더 놀란 표정이었다.
"자기야, 내 동생 같아서 하는 말인데, 거긴 아니야. 그 정도 돈을 주고 거길 사는 건 리스크가 커. 게다가 재건축도 아직 멀었어. 상가는 신중히 봐야 해. 나중에 상가 지분으로 아파트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지도 꼭 확인해 봐야 하고."
언니는 조언을 이어갔다.
"당장 임대 수익을 낼 곳이라면 유동성부터 꼼꼼히 따져야 해. 충분히 고민하고 결정해야지. 물론, 네가 정말 사고 싶다면 말리진 않겠지만, 언니 생각엔 다른 상가를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괜찮은 물건 나오면 언니가 바로 알려줄게."
그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이 내용을 전했다. "내일 아침 우리가 사려던 상가를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다음 날 아침, 유동 인구를 확인하러 상가 앞에 차를 세우고 4시간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12시가 되어도 매장은 문을 열지 않았고, 손님도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에 바로 부동산 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박하늘: 안녕하세요, 사장님. 혹시 지금 가게 문 여셨나요?
부동산: 벌써 오픈했습니다. 장사 잘되는 곳이니 걱정 마시고, 저 믿고 사시면 돈 됩니다.
하지만 언니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상가는 사면 안 된다.' 그 순간 결심이 섰다.
박하늘: 죄송하지만, 계약 못 하겠어요.
그러자 부동산 사장님은 화를 내며 말했다.
부동산: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이 물건, 없어서 못 팔아요!
박하늘: 그렇게 좋으면 사장님이 직접 사세요. 화내실 일 아닌 것 같은데요,라고 담담히 대답하며 전화를 끊었다.
사장님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계약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현명한 선택이었다. 센터 언니의 조언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큰 손실로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것이다.
오며 가며 산책 중에 들러본 그 상가는 무인가게로 운영하고 있었다. 아직 매수자는 없는 것 같다.]
언니 덕분에 그 상가를 계약하지 않은 이후, 언니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더욱 커졌다. 이후에도 언니는 괜찮은 물건 몇 군데를 소개해 주었지만, 처음 사기를 당할 뻔한 경험 탓에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남편은 신중함을 강조했고, 언니는 "이건 사면 돈 된다"라고 했지만 선뜻 투자하지 못했다.
결국, 언니가 마지막으로 추천한 00구 상가를 생애 첫 투자 목적으로 매수했다. 처음엔 단순히 재건축 단지 내 상가를 사면 아파트 입주권을 받을 거라 믿었다. 이제 불로소득으로 돈 벌 일만 남았어라고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험난한 고생길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줄 몰랐다.
생애 최초 투자한 상가 매수 과정도 쉽지 않았다. 세간의 ″상가로 아파트 입주권을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났는지 매도하려는 상가가 거의 없었다.
센터언니 얘기로는 00 부동산이 물건을 많이 가지고 계신 것 같으니 여러 군데 다니지 말고 이 부동산만 공략하라는 조언대로 빵, 커피, 간식 등을 가져다 드리며 상가를 매도하고 싶으신 분이 계시면 꼭 연락 달라고 수시로 부동산을 찾아가 인사드렸다. 어느 날 지하상가를 파시겠다는 분이 계신다고 연락 와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계약을 하러 갔다. 지금 생각하면 적은 금액도 아닌데 언니 말만 맹신하고 샀다는 것도 내 책임의 무게가 이미 올려져 있었다.
부동산 사장님도 걱정이 되셨는지 아직 아파트 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조합과 아무것도 얘기된 게 없다. 다만 지금 상가를 연도형 상가로 짓는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연도형 상가가 무엇인지 그 어떤 말도 내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투자 잘하는 언니가 ″이것 사면 아파트 받을 수 있어″ 했던 말만 들리고 그냥 믿고 싶었던 것 같다.
한마디로 콩깍지가 제대로 씌었던 것이다. 마치 보장된 미래처럼
부동산 사장님은 궁금한 게 있으면 조합에 문의도 해보시고 산정률은 0.4라고 말씀도 하셨지만 산정률이 무엇인지 모르는 나에게 의미 없는 얘기로만 들렸다. 용감한 건지 무식한 건지 콩깍지가 씐 상태로 계약을 했다.
● 연도형 상가 : 아파트 내 복리시설로 도로 쪽에 아파트와 상가를 배치함으로써 내부 동 각 동 배치에 융통성 확보와 도로변 건축 제한으로 층수를 높이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나 연도형 상가 배치로 용적률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평지가 아닌 오르막이 있는 아파트일수록 연도형 상가의 장점 수익성과 용적률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조합장과 약속한 날, 나는 백화점에서 맛있는 쿠키를 사 들고 남편과 함께 조합장님을 만나러 갔다. 코로나 시기였기에 우리는 마스크를 쓴 채로 첫 만남을 가졌다. 조합장의 사무실에는 투명 칸막이가 있었고, 조합장님은 마스크를 쓰지 않으셔서 얼굴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연세보다는 다소 젊어 보였고, 스마트하면서도 위엄 있는 분위기를 풍겼다.
재건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상가를 구매했던 우리는, 조합장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설레는 기분이었다.
박하늘: 안녕하세요. 박하늘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오늘 사무실에서 뵙자고 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조합장: 먼저 조합원이 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커피 한잔 하세요. (조합장이 커피를 내어주었다.)
조합장: 그런데 상가를 비싸게 사셨더라고요.
박하늘: 나와 있는 매물이 이것밖에 없어서요. 많이 비쌌나요?
조합장: 네, 시세보다 꽤 비쌌습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조합장은 뭔가를 꺼내 자료를 보여주었고, 남편은 내용을 확인하며 다른 용지에 수기로 옮겨 적었다.
조합장: 매입하신 지하상가가 산정률 0.4에 못 미치네요. 지금 보시는 자료를 보면, 대부분의 상가 소유자도 0.4를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파트를 받으시려면 0.4는 맞추셔야 합니다.
박하늘: 저도 알고는 있지만, 더 사려 해도 팔겠다는 분이 없더라고요.
조합장: 저희 협력 정비업체 대표도 상가를 매수하려 알아봤는데 매물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저도 주변 부동산에 물어봤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박하늘: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 질문에 조합장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조합장: 제 친구가 상가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그걸 매수하시면 0.4를 채울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다만 정확히 안 될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친구가 종합부동산세 부담 때문에 상가를 매도하려는 상황이라, 필요하시다면 연락처를 드리겠습니다. 직접 협의하시면 될 것 같아요.
조합장은 이 제안을 하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박하늘: 금액만 맞으면 사겠습니다. 얼마에 파신다고 하시던가요?
조합장: 그건 친구에게 물어봐야 알 것 같네요. 확인 후 연락처를 드리겠습니다.
박하늘: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무실을 나와 남편에게
박하늘: 뭔가 이상하지 않아? 조합장이 부동산업자도 아닌데 친구 상가를 사면 0.4가 될 거라며 제안하는 게 좀… 모양새가 좀 빠진다.
조합장: 안녕하세요. 00 재건축 조합장입니다. 생각해 보셨나요?
박하늘: 네. 저희는 필요하니 연락처 주시면 연락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화를 끊은 후, 조합장이 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었다. 나는 그 연락처로 조합장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하늘: 안녕하세요. 00 조합장님 소개로 연락드린 박하늘입니다. 상가를 얼마에 파시는지 여쭤보려고요.
조합장 친구: 0억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금액으로 진행 부탁드립니다. 아시는 부동산이 있으면 그곳에서 만나 계약서를 작성하시면 됩니다.
박하늘: 혹시 금액 조정은 어렵나요?
조합장 친구: 네, 어렵습니다.
박하늘: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후, 알고 지내던 도곡동 부동산 사장님께 계약서 작성 요청을 드렸더니 조합장의 친구와 계약 관련으로 몇 번 통화를 하셨는데 사장님은 "상대가 꽤 깐깐한 느낌"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나는 센터 언니에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박하늘: 조합장님을 만났는데 0.4가 안 된다고 하시면서, 친구분의 상가를 매입하면 얼추 0.4가 된다고 해서 그걸 사려고 연락해 봤어요.
센터 언니: 얼마에 판다고 하니?
박하늘: 0억이요. 깎아달라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셨어요.
센터 언니: 그거 너무 비싸! 조합장 친구분 지분도 작다면서? 지금 당장 00 부동산 사장님께 연락해서 다른 상가 나와 있는 게 있는지 물어봐. 특히 1층 상가가 나왔는지 꼭 알아봐야 해. 알았지?
박하늘: 네, 언니.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조만간 밥 한번 살게요.
언니 조언에 따라 00 부동산 사장님께 연락했더니 마침 1층 상가 소유자가 팔 생각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그분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며칠 후, 부동산 사장님에게 연락이 왔다.
그분이 상가를 팔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빠르게 계약 날짜를 잡았고, 조합장 친구분께는 "적정한 가격의 상가를 매수하게 되어 죄송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조합장에게도 비슷한 내용으로 정중히 메시지를 남겼다.
조합장님, 오늘 오전 잠깐 사무실 들렀지만 휴가 중이셔서 뵙지 못했습니다. 신경 써서 친구분 상가를 소개해 주셨는데, 가격 절충이 어려워 보류하고 있던 중 1층 상가에 적당한 매물이 있어 계약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합장: 1층 몇 호를 매입하셨나요? 소유자 성함과 계약 금액은 어떻게 되나요?
나는 구입한 내역을 상세히 알려드렸다.
조합장: 평수가 좀 작네요. 사신 물건을 합쳐도 0.4는 조금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한 후 전화를 끊으셨다.
조합장의 친구분 상가를 사도 0.4가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게 떠올랐다. 그런데도 내가 친구분 상가를 사지 않았다고 이렇게 반응하시는 게 조금 억울하게 느껴졌다.
결국, 센터 언니의 조언 덕분에 두 번이나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조합장과의 관계에서는 불편한 기운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