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번째 글
지난 토요일 오전, 새벽 운동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듣던 라디오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
평소에 일기(日記)를 안 쓰더라도 한 해를 정리하는 연기(年記)는 써보는 것이 좋다. 올해의 일들을 월별로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좋다.
욕심을 조금 더 내자면, 월별로 사건을 나열하기보다는 몇 가지 주제를 정해서 일 년을 회상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만의 ‘올해의 인물’ ‘올해의 책’ 등을 선정해보는 것이다.
- 중앙일보 <당신이 꼽은 올해의 인물은?> , 최인철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
나만의 '올해의 OO'리스트. 일기는 매일 쓰고 있지만 연기를 써보는 것은 처음이다. 안팎으로 다사다난했던 한해를 나도 이렇게 정리해보고자 한다.
제가 우리말 중에 가장 좋아하는 말이 '아름다움'이라는 말입니다.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회 오늘 아름다운 공간에서
아름다운 두 분을 만나고 아름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 MBC <놀면 뭐하니?> 오영수 배우님의 인터뷰 중
SNS에서 돌아다니는 짧은 영상으로만 봤는데도 이 말씀은 굉장히 마음에 와닿고 위로가 되었다. 작년부터 지속된 코로나19 사태는 여러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을 지치게 했다. 청년들은 취업할 일자리가 줄어들었고 소상공인들은 급감한 매출로 인해 줄줄이 문을 닫았다. 미래를 바라보고 열심히 달리던 사람들이 넘어지고 주저앉아 힘들어하고 있는 때에 '아름다움'이라는 단어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나 역시도 준비하던 일들이 잘 되지 않고 아직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많아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내딛는 한 발자국 앞만 바라봤다. 그런 와중에 오영수 배우님께서 말씀하신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바라보지 못했던 주변을 잠시나마 둘러보게 했다.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다 보니 어색해진 대인관계 속에서 연락하는 사람들도 줄어들어 지금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소중함이 커졌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었다. 올 한 해는 지금 현실과는 역설적이지만 내 인생 최고로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눈과 마음에 담은 아름다운 장소들이 있었다. 나에게도 이런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잠시 잊고 지냈다. 2021년 나와 함께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했던 모든 장소들, 모든 순간들에게 감사함을 전해 본다.
"다른 펭귄들도 노든처럼 나를 알아봐 줄까요?"
"누구든 너를 좋아하게 되면, 네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어. 아마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너를 관찰하겠지. 하지만 점점 너를 좋아하게 되어서 너를 눈여겨보게 되고, 네가 가까이 있을 때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알게 될 거고, 네가 걸을 때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에도 귀 기울이게 될 거야. 그게 바로 너야."
- <긴긴밤>, 루리 저
'이름'은 불리는 것의 존재를 명확하게 한다. 이름이 없이 '나'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름이 불린다고 해서 반드시 '나'의 정체성이 명확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한지 등등의 질문들은 많은 청년, 더 나아가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것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 뒷모습만 보고, 뒤에서 보는 걸음걸이로도 나라는 것을 알고 연락해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또는 방 너머에서 들리는 내 목소리, 웃음소리, 심지어 발걸음 소리로도 내가 오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 나의 행동들이 나를 규정해준다. 누군가와 굳이 비교하면서 '누구는 이런 걸 잘하는데 나는 못해, 내가 이건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저 사람은 더 잘하네' 하면서 열등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능력으로 나를 증명하려 했던 것과 위에서 이야기한 '내가 누구인지' 등 같은 고상한 질문에 답을 빠르게 해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을 조금 덜어주는 책이었다.
육지를 떠나 다양한 경험을 한 제주도가 특별하다. 3박 4일 동안 많은 곳을 보고 경험하고 사진으로 찍어 남겼다. 강렬한 경험이 있어서 특별하다는 것은 아니다. 제주도를 돌아다니면서 나도 모르게 내면에서 나만의 싸움을 했었고 꾹꾹 눌려져 있던 것이 여행의 마지막 날 터졌었다. 사실 여기서 끝났으면 제주도 여행이 최악으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주도에 같이 간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막혀있던 감정의 둑을 깨고 내가 생각했던 행복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남들에게 베풀고 도와주면서, 내 것을 조금 희생해서라도 그 사람이 행복해하면 나도 행복한 거라고 생각한 것이 조금씩 나에게 상처가 되었던 것 같다. 어찌 되었건 희생이라는 것은 나를 소모하는 일이니까. 이런 생각을 이제서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어색하긴 하지만 나에게 맞는 행복을 찾아가 보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니까. '다른 사람을 행복해하는 것이 내 행복'이라는 것이 가짜 감정이라는 말이 아니다. 분명 그것도 행복한 것이지만 관심의 대상을 나에게로 돌려서 또 다른 행복을 나눠줄 수 있는 에너지를 채울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터진 내 마음을 보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함께 꼬매 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서 행복했다.
친구의 추천으로 가게 된 그 고깃집은 뭔가 달랐다. 학생 시절에는 고깃집은 무조건 무한 리필 집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항상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 1인분당 얼마씩 받는 고깃집은 돈 없는 학생들에게는 사치였다. 싸고 양 많은 곳에 가서 이 날만을 위해 기다렸다는 듯이 고기를 불판 가득히 구우며 뱃속에 잔뜩 넣는 고기 냄새 가득한 뜨거운 싸움을 하고 나서야 만족감을 느꼈다. 나이가 들면서 호기롭게 5-6 접시 먹을 패기도 사라지고 입맛도 조금은 까다로워져서 가성비보다 맛을 따지기 시작했다. 무한 리필 집이 아닌 친구가 추천해준 고깃집에서 주방 이모님께서 구워주시는 삼겹살을 씹는 순간 터져 나오는 육즙에 행복감을 감출 수 없었다. 절로 춤이 나오는 맛이었다. 보통 음식점에서 다 먹고 나서는 잘 먹었다 하면서 나오는 순간 그 음식점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다른 생각을 하는데 이곳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생각에 떠올라 나를 기분 좋게 괴롭혔다. 요즘 코로나로 힘든 상황이지만 이 곳만은 잘 버텨주셨으면 한다.
작년 말 '쇼미더머니'라는 프로그램에서 나온 VVS라는 노래가 있다. 음원 미션으로 만들어진 곡인데 나는 음원으로 나온 곡 보다 음원 미션을 하면서 방송에 나온 머쉬베놈과 미란이 팀의 VVS 버전을 가장 좋아한다. 미션을 하기 전 같은 팀원의 불미스러운 일로 인한 하차로 세 명이서 해야 하는 미션을 머쉬베놈과 미란이 둘이서 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최고의 기량을 선보인 덕분에 대중들에게 엄청난 관심을 끌게 되었다(Mnet 공식 영상 기준으로 관련 영상 시청수만 5천만이 넘어간다). 지난 미션들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였던 미란이는 '맨 밑바닥의 소녀'의 저력을 보여주면서 머쉬베놈과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고 결국 미션을 승리하게 되었다. '역시 성공은 고난을 동반'한다는 가사 말처럼 고난을 이겨낸 그들의 모습에서 위로를 받았다는 댓글이 영상에 수없이 많이 올라왔다. 미국 서부 카우보이들이 생각나기도 하는 의상에서부터 자신들에게 처해진 상황을 해학적으로 연출한 장난감 말까지, 자신들을 증명하기 위한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보인 것이 VVS라는 노래만 듣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뒷 배경까지 그려지는 꽉 찬 콘텐츠를 제공해준 것 같다. 힙합이지만 강렬하지 않은 순한 맛의 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