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슬며시 다가왔네요

#짧은 이야기

by 신푸름

새벽마다 나서는 운동길은 추위와의 싸움이었다. 귀마개와 롱패딩까지 바람이 들어올 구멍이 없도록 꽁꽁 싸매고 나섰다. 새벽 걷기를 하는 운동장에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새벽 5시반이면 아직 영하 10도 가까이 되니까 집 밖에 나오려면 엄청난 의지를 가져야 나올 수 있었다.

오늘도 들어선 운동장에는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았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의 옷차림이 패딩보다는 얇은 겉옷들이 많았고 올해 들어 반바지를 입고 뛰시는 분도 처음 보았다.

그러고 보니 운동할 때마다 눈썹에 맺혔던 작은 얼음조각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거칠고 뜨거운 숨결이 입 밖으로 나왔다가 세찬 칼바람 때문에 눈썹 위에 그대로 박제되곤 해서 하얗게 변한 눈썹을 문질 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오랜만에 온라인 서점이 아닌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 냄새를 맡으면서 책 구경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반차를 내고 온 오후 시간이었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보고 있었다. 새 학기를 맞아 새로운 마음으로 공부하기 위해 부모님과 문제집을 사러 온 학생들이 많았고 재테크 열풍으로 꽤 많은 청년들이 재테크 관련 도서들 앞에서 골똘히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는 게 오랜만이라 당황했지만 내 관심은 어느새 새로 출시된 볼펜에 꽂혀 내가 서점에 뭐하러 왔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저녁이 되면 간판의 불빛이 번쩍거리는 광란의 밤이 되었던 거리를 지나야 하는데 최근까지 조용하다 싶더니 길바닥에 버려진 담배꽁초들이 잔뜩 늘어났다. 어젯밤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길가에 나와서 담배를 피웠을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영업시간도 늘어나면서 회식하는 사람들이 2차도 갈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그 덕분인지 여기저기 토한 자국들이 많이 보였다. 날랜 스텝을 밟으면서 함정들을 가볍게 피한 내 자신이 기특했다. 잘 피했다 이 녀석.


최근에는 병원에 내원하시는 어르신 분들이 많아졌다. 전보다 날씨가 많이 풀리면서 겨울 내내 웅크렸던 몸을 풀고자 나오셨다가 다치시는 분들이 계신다. 허리를 감싸고 끙끙거리시면서 오시는 분, 다리를 접질려서 절뚝거리시면서 힘겹게 오시는 분, 어깨가 아프시다면서 하소연하시는 분 등. 새 학기를 맞이하여 생기가 돌고 있는 대학교에서 그동안 방학 내, 아니면 그보다 전부터 숨길 수 밖에 없었던 뜨거운 혈기를 발산하기 위해 힘차게 운동했다가 다쳐서 내원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파서 왔지만 그래도 따라 와준 친구들과 함께여서 인지 헤헤 거린다.


라디오에서는 '봄바람', '봄날', '우연히 봄', '봄봄봄', '벚꽃엔딩' 같은 밝고 화사한 노래들이 넘쳐흐른다. 노래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을 담아 전한 사연을 들어보면 분위기가 많이 밝아졌음을 느낀다. 사람들이 말하는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감정, 1년마다 돌아오긴 하지만 매번 그 새로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작년의 나와는 다르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집돌이처럼 내 공간에 틀어박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지 않게 만들어준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인연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게 슬며시 봄의 계절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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