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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반찬 좀 가져다주세요.

애 낳은 산모의 애절한 부탁

by 해보름

많은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 정도로 힘들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뉴질랜드 Birth care에서의 2박을 마치고 3일째 되는 날 아침 드디어 집으로 향했다. 집에 가도 우리 셋이고 본격적인 육아가 시작될 터이지만 아이 낳고 이틀간 혹독한 산후훈련(?)을 받아서인지 그래도 새벽에 깨우는 사람 없는 우리 집으로 가고 싶었다.


아이 낳으러 나와 4일 만에 들어가는 집은 그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몇 달간 주인을 기다렸던 아이 침대, 베시넷, 아이 수건과 기저귀들, 기저귀교환대, 젖병 소독기들이 드디어 주인을 맞은 것이다. 그들에게 드디어 생명이 불어넣어 졌다. 아이는 우선 우리가 짐 정리를 할 동안 거실 베시넷에 눕혀졌고, 곧이어 기저귀 교환대에서 기저귀를 갈아졌고, 수유의자 겸 장만한 흔들의자에서 수유가 행해졌고, 모아진 젖병들은 씻어진 후 젖병 소독기로 향했다. 이렇게 쓰임이 있었던 아이들이었구나. 처음 써보는 이 물건들이 드디어 주인을 만나 이렇게 쓰이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우리 집은 불과 4일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풍경으로 새로운 날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새벽에 3시간마다 깨우는 조교는 없었지만 그래도 4,5시간 간격으로 수유를 해야 했기에 감시자가 없을 뿐 3,4시간 밖에 못 자는 쪽잠은 이어졌다. 수유 때마다 불어난 젖마사지를 하느라 내 손가락관절들은 굳어질 대로 굳어져 일주일이 지났을 즈음엔 손가락이 구부러지지 않아 머리를 묶을 수도, 문고리조차 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약을 먹어야 했고 그때부터 아이는 분유를 먹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한 번씩 신랑이랑 번갈아 아기 수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말은 3,4 시간 자던 것에서 6,7시간까지도 잘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3,4시간 간격으로 불어오는 가슴에 잠에서 깨어 유축과 마사지를 또 해야 했다.) 그렇게 일주일, 또 일주일이 지나면서 우리 오로지 아이 먹이고 재우고 씻기고 하는 일에 어느 부모가 그렇듯 24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둘이 하니 여전히 잠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매일 반복되는 일에 능숙해지며 아이케어는 금씩 익숙해져 갔다.


문제는 우리였다. 온전히 아이에 신경을 쏟느라 우리 밥을 하고, 장을 봐오고 하는 일에 쏟을 시간과 에너지가 없었다. 그래도 신랑이 한 번씩 장을 봐와서 미역국을 끓여줬다. 아이 낳기 전에 산후조리해 주러 못 오시는 엄마는 '그래도 둘이니 힘들어도 괜찮을 거야, 그리고 김서방에게 미역국만 끓여달라 해. 한 달간은 미역국 먹어야 하니 미역국만 있어도 밥 먹을 수 있을 거야.' 라며 나름 위안을 주셨었다. 그런데 막상 하루, 이틀, 일주일 제대로 된 반찬도 없이 미역국만 먹다 보니 배가 너무 고팠다. 매끼 계란프라이를 두 개씩 먹었고 그마저도 부족하면 참치캔으로 단백질을 보충했다. 그래도 무언가 허한 느낌은 계속 됐다. 제대로 된, 말 그대로 몸조리를 할 수 있는 음식이 먹고 싶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보았던 한국 산후조리원 식사가 떠올랐다. 랍스터에 전복에 고기에 매 끼 풍부한 단백질에 신선한 야채, 과일 그리고 부기 빠지도록 간식으로는 호박죽과 맛난 케이크들까지 나오는 일류호텔 못지않은 산후조리원의 식사가 왜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지... 애써 괜찮다며 나를 위로하고 그래도 빵이 아닌 미역국을 먹음에 감사해 보지만 허한 이 뱃속이 채워지지는 않았다. 그 당시는 뉴질랜드가 우버이츠도 활성화되지 않아 배달이 되는 음식이라곤 피자, 햄버거 등으로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그마저도 산후조리를 하는 산모에게는 맞지 않는 음식들이라 먹기 어려웠기에 한 번씩 신랑이 나가 사 오는 바깥 음식들에 눈이 돌아가며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그렇게 이주쯤 됐을까. 지인분들이 연락이 오고 교회집사님께서 연락이 오셨다.


" ㅇㅇ 씨, 어때요? 아이는 잘 크죠? 힘들죠?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요. 뭐 필요해요?"


나는 잠시의 멈춤도 없었다.

집사님, 저희 반찬 좀 가져다주세요.


내가 말하고도 깜짝 놀랐다. '반찬을 갖다 달라니.' 그것도 남한테.. 무언가를 받으면 꼭 그에 맞는 것으로 돌려줘야만 마음이 편한, 받기만 하면 마음이 불편한 나로서는 이렇게 남에게 먼저 부탁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어떤 힘이 작용한 건지, 그 순간 나는 약간의 죄송함은 들었지만 창피함이나 괜히 말했다는 후회의 감정 따위는 들지 않았다. 곧바로 집사님이 대답하셨다.


" 아, 그래요. 알았어요. 반찬 해두고 신랑분께 연락할 테니 와서 가져가세요."


" 네, 감사합니다."



며칠 뒤 신랑을 통해 집사님이 연락이 오셨다. 반찬을 해 두었으니 가져가라는 연락이셨다. 신랑이 집사님 댁에 가서 반찬을 가져왔다. 아니 근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생각한 것과 너무 달랐다. 나는 그저 우리 몇 끼 먹을 수 있게 마른반찬 몇 가지 넣어주셨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부탁한 것도 그 정도 선에서였고. 근데 신랑손에 들려온 건 한 보따리였다. 풀어보니 직접 만드신 수제 함박스테이크, 문어숙회, 등등 그냥 기본밑반찬이 아닌 제대로 된 음식들을 보내주셨다. 그중 하나만 있어도 몇 끼는 배불리 먹을 것 같은 음식들을 4~5가지나 챙겨주셨고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매주 다른 음식들로 챙겨주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거의 두 달 가까이 매끼 배불리 식사할 수 있었다. 당시 코로나로 가족이 아닌 이상 다른 사람의 집에 방문하는 것은 정부에서도 이웃사회에서도 모두 피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와주시지 못하고 이렇게 싸주셨고, 다른 지인분들도 현관 앞에 음식을 갖다 주시곤 했다.


정말 집사님께 너무너무 감사해서 그 싸주신 음식들을 먹을 때마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부모도 아닌데 이렇게 챙겨주실 수 있는 마음에, 감히 나는 헤아릴 수 없는 그 마음에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도 부모님과 언니의 도움을 많이 받으며 자라서 그런지 친구나 그밖에 다른 사람의 도움은 구하지 않는 편이었다. '우리 언니가 있는데, 우리 엄마, 아빠가 있는데?'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표면적으로는 친하게 지내다가도 친구가 어려울 때 도움을 구하거나 하면 그래서인지 나도 쉽게 도움의 손이 선뜻 나오지 않았다. 물론 나조차도 그랬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나의 가족으로도 충분했으니..


그래서인지 가족 이외의 누구와도 서로 힘들 때 가족처럼 도와줄 수 있는 관계를 전혀 맺지 못했다. 딱 적당한 친구로서, 적당한 지인으로서만 거리를 두며 지냈다. 그리고 그것이 이렇게 가족과 떨어져 살다 보니 내가 왜 그렇게 편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나라는 회마저 들었다. 그리고 나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가족도 아닌 남에게 이런 사랑의 도움을 주시는 분을 통해, 내가 그동안 너무나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살았음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조차도 나는 알지 못했다. 그 후에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얼마나 주위의 도움이 필요하고 그들에게 마음을 열어야 했는지를..... 그리고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맞다고 고수해 온 나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나의 관념들이 얼마나 잘못되었고, 앞으로 얼마나 깨지고를 반복하며 나를 바꾸어 나가야만 했는지를... 이 아이가 태어남으로 인해 나라는 사람이 얼마나 바뀌어 나가야 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더 바뀌어야 하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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