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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월 아이와 다시 한국행~

잠시 후퇴다!!

by 해보름

나는 잠을 적어도 7시간에서 8시간은 자야 한다. 잠을 일정시간 자지 못하면 다른 어떤 일도 해낼 수가 없다. 그래서였는지 학창 시절, 한 번쯤은 밤도 새보고 새벽까지 공부도 해볼 법한 시험기간조차도 나는 늦어도 11시에는 잠을 자야 했다. 그렇지 못하면 새벽에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한다 한들 낮시간에 집중력이 흐트러지고 정신이 몽롱해져 그나마 알고 있는 것까지 제대로 발휘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나를 가장 잘 아셔서였을까, 우리 아빠는 내가 결혼할 때 신랑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


" OO 이는 빠른 충전기가 아니라 충전시간이 좀 오래 걸리네. 그러니 자네가 그 점을 좀 감안해 주게."


이런 말을 예비 사위에게 하신 걸 보면 아빠는 혼기가 다 찬 딸을 시집보내면서도 잠이 많고 체력이 약한 내가 걱정되셨었나 보다. 근데 정말 맞는 말이었다. 비유 또한 적절했다. 충전기로 따지자면 나는 고속 충전기가 아니라 오랜 시간이 걸려야 충전이 되는 저속 충전기였다. 그래서 고속 충전기인 사람은 4~5시간만 자도 거뜬하다면, 나는 적어도 8시간은 자야 충전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에게 매일같이 새벽에 일어나서 잠을 깨고 수유를 한다는 건 내 일생일대 가장 크고도 힘든 챌린지였다. 그것도 80일 정도까지는 한 번이 아닌 두 번이나 깨야했으니, 새벽에 한두 시간씩 쪽잠을 자는 걸로 하루이틀도 아닌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일을 버텨야 했다. 처음 한 달은 신랑이 휴가를 내어 같이 도와줬기에 4~5시간까지도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신랑의 휴가가 끝난 뒤부터는 주중에는 오로지 새벽수유는 내 몫이었다. 그렇게 80일이 지나고 100일 지난 무렵, 어느 새벽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어나서 아이 수유를 하고 아이를 눕혔는데, 가슴이 너무 답답해왔다. 100일이 지나면 통잠을 잘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했고 내 한계는 엄청난 무게로 그 새벽 나를 짓눌렀다. 숨 쉴 수가 없었다. 그저 패닉에 가까운 느낌이 나를 계속해서 짓눌렀다. 나는 옆방에서 자고 있는 신랑에게 카톡을 보냈다.


" 신랑, 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미안해."


진심이었다. 내 안에 나의 목소리였다. 정말 언제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지 더 이상 버틸 수는 있을지 너무나 희미했다. 그만큼 나의 체력은 고갈되어 가고 있었고, 그 고갈된 체력은 정신까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을까, 낮에 아이를 수유하고 배시넷에 앉혀두고 있는데 갑자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답답함에 가슴을 부여잡았고 그 상태로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머리맡에 아이가 엄마의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울기 시작했다. 소리는 들리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을 뻗어 아이를 토닥일 수도 없었다. 간신히 옆에 핸드폰을 부여잡고 신랑에게 전화를 했다. 신랑은 111에 신고를 해주었고, 잠시 후 앰뷸런스가 집에 도착했다. 구급대원들은 나를 바닥에 눕히고 심장부위에 패드를 붙이고 심장박동 검사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한 응급실에서 나머지 심장검사와 피검사가 이루어졌다. 한참 후 의사가 왔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물었다. 나는 숨 쉴 수 없이 가슴이 조여왔고, 그 후 몸을 움직일 수 없어 쓰러졌다고 이야기했다. 의사는 다 듣더니 답했다.


"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습니다. 심장도 정상이고, 피검사도 모두 정상입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나는 그렇게 숨이 멈출 것처럼 호흡이 안 되었는데 모든 게 정상이라니..' 나는 덧붙여 현재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이 낳고 여태껏 잠한숨 제대로 자지 못한 것과 아이를 케어하느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많이 힘든 상태라는 것을.. 그러니 모두 정상일지라도 영양제라도 한대 놔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의사는 답했다.


" 육아로 인해 잠이 부족해서 힘드신 상태이군요. 그렇지만 검사상 모두 정상이니, 물 한잔 드시고 가세요. 그리고 주위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세요."


아, 다시 한번 정신이 들었다. '여기 뉴질랜드지? 내가 또 뭘 바란거지?' 아이 낳자마자 바로 수액을 빼버리고, 6시간 만에 병원에서 내보내는 나라에서 육아로 잠못자서 수액을 놔달라니.. 당치도 않은 것을 나는 또 바라고 있었다. '그래, 물 한잔 마시고 집에 가자.' 내가 느낀 뉴질랜드의 병원은 오래 있을수록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저 검사결과가 나와 큰 문제가 아니면 그냥 집에 가는 게 맘 편하다. 그렇지만 문제는 집에 와도 도움을 받을 가족이 없다는 거였다.






머릿속으로만 꿈꿔왔던 이상의 세계 속에서 이민은 너무나 멋지고 부럽고 따뜻했다. 전혀 모르는 새로운 사람들과 같이 생활하고, 의사소통을 하고 모든 것이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나에게 환상이었다. 그러나 발을 디디고 현실이 되어 환상의 거품이 모두 사라진 이민의 세계는 온몸이 시릴 만큼 찼고 차다 못해 아팠다. 이상을 꿈꿀 때는 그 꿈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작 그 이상이 이루어진 현실에서 나는 혼자 할 수 있는 게 너무도 많지 않은 부족하고 나약하고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약하디 약한 인간이었다. 가족생각이 사무쳤다. 나 혼자로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후로도 같은 증상이 두세 번 반복됐다. 반복되는 증상 속에서 두려움과 압박은 나를 더 옥죄어와 나의 정신은 그야말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만들었다. 내가 나를 탈피해서 이겨 나와야만 하는데 나 스스로는 도무지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가 원하는 건 딱 하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주일만 잠을 자고 싶었다. 아니 3일만이라도 잠을 푹 자고 싶었다. 그러면 무언가라도 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부터 신랑과 대책을 논의했다. 신랑이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고, 도우미를 쓰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일주일에 몇 번 3~4시간씩 신랑이 휴가 끝난 후부터 두 달 여정도를 쓰기는 했지만, 비용이 많이 비쌌기에 (시간당 25불이었다. 보통은 30~35불인데 나는 그나마 싸게 구한 편이었다. 하루에 4시간씩만 써도 하루에 100불, 한 달을 쓰면 한화로 160만 원 정도였다.) 아이 100일까지 쓰고는 더 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몇 날 며칠을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론이 나왔다.


"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자~!"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당시 뉴질랜드는 코로나 발발 후 곧바로 외국인 전면 입국금지 조치를 내리고 해제조치가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였다. 변이 바이러스로 코로나가 더 심해진 상황에서 향후 몇 개월 안에 뉴질랜드에 외국인이 들어올 가망성은 없었다. 그렇다면 정말 답은 하나였다. 가족들이 올 수 없다면 우리가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신랑과 결정을 내리고 일사천리로 준비에 들어갔다. 가장 오래 걸리는 신랑 비자 신청부터 집문제, 그 사이 거취문제, 온갖 생활 물품 정리문제 등등 처리해야 할 것들이 태산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둘씩 차근차근, 그렇지만 서둘러 한국 갈 준비를 했다. 잠시 여행 가는 게 아닌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역이민이었다.

짐을 다 처분하고 아이짐만 남아있던 거실과 볕이 잘들었던 우리집 데크


그리고 두 달 후, 우리는 5개월 된 아이와 함께 락다운으로 폐쇄된 오클랜드 공항에 들어섰다. 그 당시는 외국인 입국 전면 금지와 더불어 전 나라가 가장 심각한 경계령인 단계로 모든 국민들은 집 밖을 마트, 주유소, 병원 이외에는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공항에는 티켓을 끊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외국을 나가는 사람은 우리처럼 이민자들 소수 밖에 없었다. 마치 공항은 유령공항 같았고 우리는 흡사 재난영화에서 재난이 일어난 곳을 벗어나는 사람들처럼 그곳에서 얼른 벗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나의 5년 3개월의 이민기간이 재난과도 같았다고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여기에서 머뭇대다가는 이 탈출이 저지될 것만 같았다. 유령으로 변해버린 공항에서 우리 셋은 조용히 숨죽인 채 탑승을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자리에 앉아 너무나도 익숙한 한국인 승무원을 만난 순간 나는 그제야 안도의 큰 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간다. 가기만 하면 된다. 나의 베이스캠프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충전이 언제 끝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충전이 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나의 5년 3개월의 달콤했지만 그 안은 너무나 써서 삼킬 수도 없었던 나의 이민생활이,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나의 이민생활의 1부의 막이 그렇게 내리고 있었다.

레벨 4 로 텅 비어 유령공항 같았던 당시 오클랜드 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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