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다시, 시작하는 부엌

by 고양이삼거리

(이사하고) 이제야 집 정리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예전보다 방들이 작아서 각자 필요 없는 것을 버리고 정리하는 일에 시간이 많이 들었다. 주로 r의 방 침대 아래, 장 뒤편의 사각지대에 쌓아두었던 어릴 적 동화책과 문제집, 그리고 앞 베란다에 있던 플라스틱 눈썰매 같은 계절용품과 전자기기 상자들, 기타 등등의 오랫동안 쓰지 않은 들통 같은 것들이다. 지금, 외부공간은 세탁기 들어가는 보일러실 겸, 작은 베란다가 다 여서 어디 숨길 곳이 없는데, 다행히 세탁실 상부장이 튼튼하고 깊어서 각종 세제, 병들, 신발상자와 전선 세트 등을 알차게 수납할 수 있었다. 빨래 건조대도 세탁기 옆 외부에 세울 수 있어서 다행이다, 바람이 잘 분다.


대신, 거실이 넓어져서 r의 방 빼고 거의 모든 가구가 거실로 나왔다. 이렇게 되니 우리 방은 온전히 아늑하고 고요한 침실로 만들어졌고, 거실에 큰 테이블과 책상 세 개, 소파, 낮은 책장 6개가 옹기종기 모여들었는데 각자의 스탠드까지 배치되면서 제법 작업실 분위기가 난다. 어제는 바닥에 놓는 플로어 스탠드를 하나 구입했는데 1인용 소파 사이에 놓기로 했다.


부엌은 ㄱ 자 형태로 구획되어 있는데 가구 문짝의 무늬가 요란해서 조금 심란하지만 상부장 아래 바람 통하고 햇빛 잘 드는 작은 창과 ㄱ자 모서리에 생긴 넓은 구역이 있어서 바질화분을 놓고, 크리스마스 전등을 켜며 분위기를 바뀌고 있다. 기존 붙박이 작업대에 연장해서 가지고 있는 선반을 예전처럼 도마를 올려 쓰고 있고, 왼쪽 벽에 가로로 붙여서 식탁을 놓았다, ‘_ ’가 왼쪽 벽이 붙어 짧은 ‘그’ 정도의 형태. 냉장고는 작업대 끝의 반대편 벽에 통로를 만들면서 놓았다. 냉장고가 조금 먼 듯 하지만 부엌을 확장한 효과가 있다. 어중간하게 넓은, 방으로 통하는 통로의 폭에도 딱이다.


이사해서 보면 부엌만큼 다른 이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또 없다. 어느 때보다 구석구석을 공들여서 살펴야 하고 깨끗하게 오래된 기름때를 제거해야 한다. 작동하지 않는 레인지후드도 모터를 손보고 필터도 교체했다. 이번에는 이렇게 써볼까 하며 싱크대의 거름망을 둥그스름한 것으로 바꿨다. 하나 둘 손대면서 길들이고 길들여진다. 부엌을 운영하는 기본 시스템은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스레인지-조미료-싱크대-작업대-도마-냉장고-그리고, 식탁이다. 손 잘 닿는 곳에 자주 쓰는 것을 놓고, 사용 빈도에 따라 멀어진다. 냉장고 근처에 컵과 주전자, 가스레인지 근처에 소금, 기름, 고춧가루 등 조미료, 싱크대 위에 각종 그릇, 코너 넓은 구역에 조리도구가 올려지고, 냄비, 프라이팬이 들어갔다. 그렇게 그릇과 도구를 채우고 보니 전과 비교해서 분위기가 다르지만 비슷하다. 걸린 세척솔과 r이 어릴 때 만들어온 풍경, 햇빛에 투명해진 초록 물컵, 티타임 구역, 사과와 감. 식탁과 붙여 쓰던, 우리에게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던 널찍한 테이블은 거실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완전하게 거실과 부엌이 분리되어서 부엌이 전보다 작아진 것 같은데, 면적으로만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 수납면에서도 그렇고. 이 부분이 아직 남아있는 어색함으로, 방법을 생각해보고 있다. 조금 재미있는 구석을 만들어야 한다.


집에 와서 만들어 먹은 첫 끼는 루꼴라 파스타다. r이 기르던 루꼴라를 채집해서 삶은 푸실리와 들기름, 간장을 살짝 뿌려 먹었다. 다음날도 r이 기르던 바질을 다져서 버터 바른 빵에 발라 먹었다.


이제, 요리를 시작하기 위해서 필요한 건 ‘장보기’다. 어디서 어떻게 재료를 살 것인가. 근처 시장에 나가서 바로 구운 김을 한 봉 사고 채소 가게에서 호박과 두부를 사서 된장찌개를 만들어 먹었다. 맛있는 즉석 구운 김을 살 수 있는 시장이 가까이 있다는 것은 엄청난 혜택이다. 이걸 사려고 멀리 떨어진 곳까지 가기도 했었다. 사장님은 정갈하게 6등분 해주시기까지 했다. 너무 짜지 않고 간이 맞는 것도 훌륭하다! 다음은 미역을 사서 미역국과 두부구이를 먹었다. 어느 날 밤은 할머니 순대집에서 순대를 샀는데, 몇십 년 장사하셨다고 적혀있었지만 순대를 잡고 너무 ‘뜨겁네, 뜨거워’하시며 손끝을 부는 모습이 반전 매력 같이 느껴졌는데, 순대도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 몇 군대 채소 가게도 들르고 떡 집도 들러보았다. 오늘은 생선가게에서 꽃게를 사서 최초의 꽃게탕을 끓이는 일을 해냈고 추운 날에 딱 맞는 맛 좋은 국물 요리로 손색이 없었기에, 이제야 무언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제야 나의 새로운 부엌이 작동하는 것 같아서 글을 남기고 있다.


이렇게 시작됐다.



https://brunch.co.kr/@bluetable/571

keyword
작가의 이전글김밥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