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여성, 호르몬의 저주
짜증이 부쩍 늘었다. 뾰루지가 우후죽순 마구 튀어나온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이제 정말 폐경이 진행 중이다. 46살, 너무 이르지 않은가 했다가 생각해보니 내가 어릴 때 마흔은 까마득한 아줌마였다. 결혼을 안 했어도 나이로는 벌써부터 아줌마였다. 나이를 생각해 받아들이자. 보통 폐경과 갱년기 증상은 50세 전후에 시작되나 애를 낳지 않은 사람의 경우 그보다 5년 정도 빨라진다니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시기에 갱년기를 맞이한 것이다.
지난 금요일 산에 가서 짜증을 많이 냈다. 힘들기는 했다. 전날 마감 치고 힘들었고, 아침부터 설사를 했다. 마감 후 먹은 삼겹살이 문제였을 것이다. 가끔 돼지고기를 먹으면 설사를 할 때가 있다. 한동안 조심해야지.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걱정이 됐다. 평소에도 저질 체력이지만 그 날은 컨디션까지 좋지 않았으니까.
길은 험했고 멤버 중 뒤에 쳐진 언니 상태가 심각했다. 한동안 집에만 있다가 오랜만에 산행을 나온 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일행들과 너무 많이 떨어져서 혼자 언니를 데리고 돌아 내려 가야 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처진 두 명과 만나고 앞에 연락을 부탁하고, 언니를 쉬엄쉬엄 쉬게 하고 물도 마시게 하고 천천히 올라갔다. 하늘이 보이는 것을 보면 능선의 끝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정상까지 갈 것도 아니고 적당히 올라가다 내려갈 것인데 희망고문처럼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날은 일행이 8명이었다. 선두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전했다. 400미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천천히 오란다. 전화가 잘 터지지 않아 제대로 통화하지는 못했다. 언니의 짐을 나누어 짊어지고 그때부터는 욕을 하면서 걸었다. 돌아 내려 가기에는 이미 멀리 왔고, 시간도 한참 지체가 되었다.
겨우 일행이 모두 모여 간단히 밥을 먹었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언니의 짐을 건장한 동생에게 넘겨버렸다. 상태가 좋지 않던 언니는 도시락도 안 먹고 자리 펴고 누웠다. 나도 밥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짜증만 부렸다. 처음 가는 산은 다시 안 가겠다 했다.
내려가는 길은 더 심각했다. 안 그래도 전날 마감 치고 견갑골이 아팠는데 밧줄을 잡고 내려가려니 어깨가 빠질 듯했다. 빨리 집에 가서 반신욕으로 몸을 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주차장에 도착해 화장실에 갔더니 생리가 터졌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뻗었다.
6-7개월 전부터 이상했던 생리는 108배를 시작하고 정상으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지난달부터 다시 이상 징후가 보인다. 이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폐경이다. 받아들여야지 하면서도 갑자기 치솟는 짜증과 불규칙한 주기로 아무 때나 불쑥 시작하니 힘들다.
엊그제 약국에 가서 약을 한 보따리 사 왔다. 요즘 가족과도 자주 부딪치고 사람들에게도 부쩍 짜증이 심해졌다. 다 호르몬의 저주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도 호르몬이 이상해서 짜증을 내게 된다니 어쩌겠는가. 몸에 좋다는 약을 주는 대로 받아오고 보니 한 달 약값이 12만 원이나 한다. 비싸기도 비싸다. 망할 호르몬과 갱년기!
며칠 째 반신욕을 몫하고 108배를 한다.
어제는 마감 때문에 108배도 못하고 그제부터 계속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원고 넘기고 국수 한 그릇 먹고, 바로 침대로 직행. 꼬박 14시간을 붙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몸을 뒤척이는데 오른쪽 견갑골에 통증이 찌르르 온다. 아, 목디스크!
게으름을 좀 피우다가 페이스북을 열었다. 연애를 하다가 헤어질 때 말하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는 나쁜 남자의 게시물에 댓글을 달았다. 헤어질 때 말없이 사라지는 게 버릇이었던 12년 샹놈과 날 지워, 단 세 글자의 문자 하나 틱 보내고 사라졌던 샹놈의 이야기를 올렸다. 짜증이 솟구친다.
마음을 잡고 108배를 했다. 견갑골에서 우두득 소리가 나고 아프다. 그래도 하면서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아 꾹 참고 절을 했다. 중간에 쉬면서 댓글놀이에 빠졌다가... 겨우 108배를 채웠다. 절을 하며 팔을 휘두르니 견갑골이 좀 나아지는가 싶었는데, 밥을 먹다 갑자기 왼쪽 턱 근육이 팽팽하니 아프다.
이런 젠장. 마사지받고, 반신욕을 해야겠다. 오늘은 기획안을 수정해야 하는데, 이 몸으로 어떻게 하지?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얼굴에 뾰루지가 또 하나 늘고, 짜증이 솟구친다. 그런데 왜 제목은 다행이냐고? 그나마 108배를 하지 않았으면 이렇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테니까...
친구들이여~ 내가 짜증을 내도 좀 참아줘. 내 마음은 안 그런데 다 호르몬의 저주 때문이야.
호르몬의 저주에서 벗어나면 다시 우아해지도록 노력할게!
108배 시즌1 9일차 _ 2020년 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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