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 스님의 <안 되겠다, 내 마음 좀 들여다봐야겠다>를 읽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분노와 그에 따른 거친 생각들이
오고 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렛고(let go)라고 합니다.
잠시 내려놓고 가만히 지켜보는 것입니다.”
- 용수 스님
친구네 집에 갔다가 새벽 늦게까지 와인을 마시고 늦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친구는 나가고 없다. 부지런한 녀석은 브런치 모임에 갔단다. 곧 들어온다는 말에 친구의 책을 한 권 들고나가 바로 앞 카페에 갔다. 카페는 주말이라 문이 닫혀있는데 앞의 벤치와 커피 테이블은 그대로 있다. 앉아서 책을 읽고 있자니 바람이 살랑살랑 시원하다. 코로나 19와 장마, 태풍으로 기억될 2020년 여름도 이제 끝이 보인다.
자연의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 코로나 19와 지구온난화로 시끄럽지만 그 때문에 유난히 길었다는 장마와 잦은 태풍에 걱정이지만, 대자연의 시간은 그들이 정해놓은 패턴대로 간다. 긴 장마와 역대급 태풍 등은 그 패턴을 지킬 수 없게 한 인간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인생도 그와 같지 않은가. 자잘한 하루의 일상과 크나큰 변화가 발생해도 당장은 그 변화에 적응하려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변화와 상관없이, 그 때문에 내 일상이 바뀌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용수 스님의 잔잔한 글을 읽다 보니 요즘 내가 멍한 시간을 자주 보내는 것도 급격한 몸과 마음의 변화에 적응하기 힘들어 ‘렛고’하는 것 같다.
코로나가 길어지면서 좋은 점은 정말 소중한 것,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것을 구별하기 쉬워졌다는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친구들 만나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정말 보고 싶은 친구는 둘셋씩 집에서 만난다. “다음 모임에서 봐~” 했다가 모임이 계속 취소, 연기되면서 보지 못한 친구들이 이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따로 연락을 해온다. 밥이라도 먹자, 했는데 식당도 9시면 문을 닫는다.
“제가 요리할게요.”
그는 좋아하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해 맛있는 음식 해주는 것을 인생의 큰 즐거움으로 삼는 게자리라 두말없이 좋다고 했는데, 어머나! 이북식 닭찜을 해놓았다. 토종닭에 쪽파와 부추를 잔뜩 얹어서 쪘는데 살이 쫀득하니 맛있다. 육수로 겨자소스까지 완벽하다. 내가 디저트로 가져간 요거트 아이스크림도 아주 맛있었다. 제주 애플망고를 올렸는데 아이스크림과 생과일은 뭐든 잘 어울린다. 음식이 맛있으니 세 여자의 수다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오랜만의 모임이라 그랬는지, 호스트도 살랑살랑 꽃무늬 원피스 차림이었고, 나도 새로 산 옷을 입고 갔다. 바로 이웃에 사는 언니도 쨍한 보라색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나타났다. 언택트 시대, 아무리 예쁜 옷도 입고 갈 곳이 없어 친구들 만나는데 새 옷을 입고 간 건데... 친구들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페친인 디자이너가 쇼룸을 10년 만에 이전한다고 특가 세일을 진행했다. 마실 겸 쇼핑을 갔다가 충격을 먹었다. 왜 여성 옷은 44,55 사이즈만 만드는 것일까? 물론 그 디자이너는 맞춤옷 전문이기는 하다. 디자인과 핏이 마음에 들어 “제가 옷에 몸을 맞춰볼게요” 하고 몇 벌을 들고 왔다. 그리고 그 날부터 식이요법을 시작했다. 00 다이어트 따위 내게 맞지 않으니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직접 요리해 먹되 탄수화물=밥과 빵을 제한하고 술은 와인만 마시기로 했다. 정확히 일주일 만에 1.5킬로그램이 빠졌고, 마음에 쏙 들었던 와이드 팬츠는 편하게 입을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요즘 거의 매일 요리를 한다. 토마토와 아스파라거스 같은 채소를 듬뿍 넣고 계란이나 조개관자 닭고기 등 메인을 바꾸어 오븐에 굽거나 프라이팬에 볶는다. 양념은 소금과 후추, 바질, 마늘 그리고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다.
“남편을 바꿀 수 없으니 그릇이라도 바꿔야겠어.”
엄마는 두 달 전 주방 싱크대를 바꾸신 데 이어 그릇도 싹 바꾸셨다. 아빠가 그릇이라고 알록달록 요상하다 하시니 엄마는 51년 된 남편을 바꿀 수 없으니까 내 그릇은 내 맘대로 바꿨으니 암말도 하지 말란다. 10년도 더 되었지만 깨지지 않는 튼튼한 그릇이 싫어서 내가 바꾸자고 했더니 “내 살림이야!” 하시던 울 엄마답다.
덕분에 나는 예쁜 그릇에 음식 사진 찍는 재미에 빠졌다. 좋아하는 식재료를 써서 맛있는 요리를 직접 만들고 예쁜 그릇에 덜어, 사진 찍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재미까지 더해지니 이번 식이요법은 덜 괴롭다. 내가 만드는 음식들은 대개 애피타이저 같아서 먹고 나면 입맛이 돋는다. 메인으로 고기나 밥, 파스타 등을 더 먹어야 할 것 같은 게 가장 문제다. 그래도 만들고 먹고 사진 찍어 올리는 데 시간이 꽤 걸려서 참을 만하다.
자연은 인간이 주는 대로 돌려주듯이, 옷도 사이즈도 거짓말하지 않는다. 예전에 예쁘게 맞던 옷이 이제 안 맞는 것은 옷이 작아진 게 아니라 내 몸이 찐 것이다. 정사이즈의 옷은 원래 내게 잘 맞지 않는다. 팔다리는 길고 가슴은 크고 그래서 어깨는 맞아도 소매가 짧거나 품이 작다. 그래도 바지는 맞아야 하는데 살이 찌니 바지가 가장 문제였다. 식이요법 일주일 만에 바지는 편하게 맞췄다. 앞으로 한 달만 더 열심히 해서 옷에 맞춰야지.
아무리 세계가 전염병으로 아우성을 친다 해도 보고 싶은 친구들은 보고 살아야 한다. 대신 나도 친구도 병에 걸리지 않게 조심조심 다니고 방역수칙은 지키자. 세상이 뒤집어지고 경제가 곤두박질을 쳐도 사람들은 일도 하고 사랑도 하고 다이어트도 한다. 결국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똑같다. 그러니 오늘도 렛고~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보며 내가 더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자. 삶은 지금 이 순간도 계속 진행 중이고 행복은 디테일에 있으니까. 매일 하는 108배도 더 열심히!
108배 시즌1 42일 차 _ 2020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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