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딱 한 사람만 내 마음을 알아주면 된다
10월에 아침방송 메인작가 제의가 들어왔을 때, 머뭇거렸다. 이명과 불면증 때문에 다니는 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와 의논을 하니 그도 역시 머뭇거렸다.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완전히 밤을 새워야 한다면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수면 불균형과 이명이 더 심해질 수 있으니까.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것은 좋으나 밤은 새우지 말라고 3교대로 일하는 병원 간호사들이 수면 때문에 힘들다고 조언했다. 아침방송이 아닌 다른 일을 시작했다고 하니 의사는 반겼으나 어쨌든 지금도 비정기적으로 밤을 새워 원고를 쓴다.
어제 일하다 밤 11시가 넘어 갑자기 뒷골이 당겼다. 안 되겠다 싶어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고 바로 잤다. 눈 뜨고 일어나니 오 마이 갓! 11시다. 12시간을 꼬박 잔 것이다. 불면증이고 뭐고 매일 수면 부족으로 좀비처럼 다닌 때문일까? 수면제에 심하게 반응하는 것일까? 어쨌든 몸은 가벼워졌는데 마음이 무겁다.
내일은 첫 방송이고, 두 번째 방송의 종편이 있고, 세 번째 녹화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첫 방송 영상을 모니터링하고, 종편을 위한 자막을 뽑아야 하고, 대본을 써야 한다는 말이다. a4로 써야 할 원고량이 약 100장 정도다. 글자크기가 12 포인트라는 것이 위안일까?
방송 말고도 들여다봐야 할 자료와 수정할 원고가 산처럼 쌓여 있다. 이렇게 바쁠 때 가장 좋은 것은 우선 생각나는 대로,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것이다. Just Do It!!
그러나 지금 난 108배를 하고 커피를 내려 마신 다음 욕조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우선 머리를 맑게 하고 달려보자는 생각이다.
내가 처음 방송작가를 시작했을 때, kbs <강력추천 고교 챔프> ‘막내작가(요즘은 '보조작가'라 부른다)’로 들어가 밥 먹듯이 밤을 새우고, 두어 시간 자다 벌떡 일어나 택시 타고 출근해 지방 출장을 다닐 때... 엄마는 택시비로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셨다. 당시 월급이 50만 원이 채 안 됐고 택시비는 한 번에 2만 원 정도. 일주일에 두세 번 택시를 타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루는 엄마한테 왜 그랬는가 물었더니
“우리 막내딸이 드디어 사람 구실하고 사는 것 같아서”라고 했다.
어려서 잔병치레가 많아 매일 코피 흘리고, 링거 맞고 없는 살림에 불고기에 계란, 우유 열심히 챙겨 먹여도 살이 오르지 않아서 걱정(한때 그랬을 때가 있었다)이던 애가 일한다고 다니면서 힘들다 투정 한 마디 안 하고 눈 뜨면 출근하고 돌아오면 쓰러져 자고, 늦잠 자면 엄마한테 신경질을 내는데... 아 그래도 얘가 일을 하는구나. 사람 구실은 하고 살겠구나, 마음이 놓이셨단다. 당장 월급이 쥐꼬리 같아도 버티면 올라갈 텐데... 그걸 못 견디면 안 되는데... 그래 편하게 택시 타고 다니게 동생 친구 택시기사에게 요금을 지불하셨단다. (지금도 방송국 보조작가들이 최저임금을 못 받고 일하는 형편이니 20년 전을 말하면 뭐하겠어요)
아침에 절을 하는데 그때 그 시절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엄마는 그때 지금의 내 나이보다 5살쯤 많았을 것이다.
그래 작은 일 하나에도 최선을 다하고 몸이 힘들어도 밤을 새우는 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미쳤어’, ‘오 마이 갓’을 외치면서도 이 시국에 일이 있음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지난 20년 동안 씨앗 뿌려놓은 일의 통합으로 돌아온 일이라 더 뿌듯하다. 10년 넘게 얼굴 안 보고 일한 광주의 감독이 지난봄에 말도 안 되는 원고료로 일을 부탁하더니. 내년부터 그 프로젝트의 홍보를 턴키로 수주했단다. 고맙다고 계속 일해 달라고 한다. 프리랜서로 계약서도 없이 일하다 보니 떼인 돈도 많고 사람보다 입금을 믿지만, 그래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아직 계약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신이 난다. 나는 아직도 입금을 부르짖으면서 사람을 믿는 미련 곰팅이로 일하는 모양이다. (신기하게도 브런치를 쓰면 일쪽으로 좋은 소식이 오는 징크스가 생겼다. 매일 써야 하나 가끔 서야 하나 고민이다.)
아침 루틴이 하나 더 늘었다. 엄마가 부활초를 주신 덕분이다. 아침마다 초를 켜고 주모경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를 용서하시고”
(가톨릭 기도문 <주의 기도> 중에서)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가톨릭 기도문 <성모송> 중에서)
기도문의 이 문장이 참 좋다.
믿자. 믿는다. 오늘도 ‘Just Do It '의 정신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면 좋은 일로 내게 돌아올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서 좋게 대하고 내가 먼저 좋은 마음을 내면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딱 한 사람만 내 마음을 알아주면 된다!
108배 시즌 1 72일 2020년 4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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