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을
‘인체의 다섯 가지의 감각 중에서 가장 애용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에 대다수가 ‘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눈’을 통해 아름다운 풍경을 나의 기억에 담아내고 필요한 지식을 머리 속에 입력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을 직접 마름질해낸 조물주가 아니기에, 각자에게 익숙해진 ‘세상’이 별개로 존재한다. 혹자는 ‘불안’에 대한 하이데거의 담론을 설명하는 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에 대해 소개하는 것만큼이나 익숙할지도 모르겠지만, 옆에 있는 친구보다 협심증의 연관통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는 어려움을 겪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을 통해 두 사람 간의 지식의 양의 우월관계를 따질 수 있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직업을 예를 들어보아도, 사람들은 자신의 직무에 대해서는 루틴화가 되어있기에, 지식과 관심사의 초점도 직업과 관련되어 있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도 이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또한 현시대의 사회는 전 분야에 있어서 복잡성을 이유로 분업화를 피할 수 없었다. 자유경쟁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된 전문 지식과 역량을 만들어내고자 노력한다. 이러한 경향성은 사람들 간의 공감대를 담보로 효율성을 융자해온 것과 다름이 없다. ‘이웃간의 소통 부재’, ‘1인 가구의 증가’, ‘사라진 공동체 의식’ 등은 우리가 최근에 뉴스, 책에서 지겹게 봐오던 주제일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서로가 다른 위치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음’에 대한 인식의 부재에 방점을 두고 싶다.
집단, 세대 간의 갈등이 현시대를 표현하는 키워드라고 하는 만큼, 익명성으로 드리워진 인터넷 공간에는 비판과 힐난으로 가득하다. 상대에게 지식의 부재를 지적하며 인격을 모독하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배척함으로 타자 없는 컨센서스에 도달한다. 각자가 다른 위치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무의식은 타자에게 자신의 시야를 강요하고 있다. 지식의 부재가 아닌 관심사의 차이이며, 의견 일치는 당위적 결과가 아닌 소통의 결과물 중 한 경우인 것을 끝내 깨닫지 못한다. 한 가지 예시로 우리가 역사를 배우거나 고문헌을 통해 지식을 습득할 때도, 시대상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동일한 사안이라 할지라도 현시대와 과거에서 바라보는 시각에는 확연한 차이가 존재하고, 우리는 이를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는 빛을 수용하는 광수용체는 망막의 안쪽층에 존재한다. 광수용체는 막대세포와 원뿔세포로 이루어져 있는데, 막대세포는 빛에 민감하여 흑백의 시각기능을 하지만 색을 구분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따라서 빛에는 둔감하지만 색각을 담당하는 원뿔세포와의 협업이 필요한 것이다. 막대세포와 원뿔세포는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잘 바라볼 수 있는 정보들을 습득하게 되지만, 서로를 보완하는 공생의 작용을 하기에 비로소 온전한 시야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각자의 위치에서 사유의 부재와 함께 보이는 것만을 보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채로운 무지개가 아닌 흑백의 논리만을 보게 될 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지를 깊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광활하고 망망한 세계를 얇디얇은 인식의 폭으로 재단해보고자 하는 욕심은 스스로를 타자와의 아이러니와 불협화음으로 몰고갈 것이다. 세계를 끝내 굽어보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닌, 나의 주변을 온전히 느끼고 이해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나와 타자가 서 있는 위치를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사유의 노력이 더해진다면, 우리는 사전에서 ‘갈등’이라는 단어를 지우는 날을 고대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