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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Aug 14. 2022

빨간 불엔 무조건 멈춤

내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는 자세

예고도 없이 빨강 불이 켜졌다.
속절없이 멈출 수밖에


 허리디스크가 갑작스레 찾아왔다. 걷지도 서지도 못할 정도의 통증은 정말 처음이다. 결국 응급실에 실려갔다. 수술하기 바로 직전 단계. 4,5번 디스크가 탈출돼서 왔는데 다른 곳도 위험한 상황이라고. 더 심해지기 전에 고장 난 곳을 치료하자 결심하고 다음 학기 휴직원을 냈다. 링거를 꽂고 병실 작은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엄쳐 다닌다. 나는 지금 어느 계절쯤 왔을까. 나에게 가을 그리고 겨울이 있었나? 뜬금없는 질문에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우리나라는 자연의 축복 같은 4계절을 가졌다. 농사를 지어 작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각 계절이 주는 적절한 기온, 비, 눈, 바람, 흙 등... 자연이 주는 생명의 순환은 신비롭기만 하다. 매해 봄, 작은 씨앗 하나가 싹을 띄워 한 식구를 너끈히 먹여 살릴 열매도 주고 곡식도 준다. 가을에는 잎과 열매를 다 비워내고 겨울에는 가녀린 가지를 늘어뜨리고 긴긴 어둠의 시간을 견뎌낸다. 겉보기엔 죽은 것 같지만 다음 생명을 키우기 위한 외롭고 고독한 기다림 같은 시간이 가을 그리고 겨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을, 겨울이 없다면 어떨까.


여름 그리고 여름


몇 년 동안 무거운 열매를 내려놓을 시간도 없이 계속 버텨서일까. 꼿꼿했던 허리가 어느 순간 무너져버렸다. 무거운 땅을 뚫고 싹을 틔우는 봄, 잎과 열매를 키우는 여름이 땅이 아닌 가정과 학교라는 곳에서 반복되었다. 우리 집 애들을 돌보는 1.2월, 학교 애들을 돌보는 3~6월, 다시 우리 집 애들과 보내는 7~8월, 또다시 학교로 돌아와 열매를 키우는 9~12월, 봄-여름-봄-여름의 계절만이 있었던 것 같다.

이 와중에 나 자신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일과 가정을 오가며 짬이 날 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배우고 싶은 일들을 챙기며 살았다. 아이들을 돌보라고 준 휴직이라는 시간을 아이를 돌보고 또 나의 성장이라는 시간으로 환원해 쓰며 한 시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됐을까. 정성껏 키운 열매를 내려놓지 않고 또다시 봄의 씨앗을 키워내려고 하니 내 안의 에너지와 체력이 나도 모르게 소진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몸은 병원 침대에 붙들려있지만 머릿속은 초대치 않은 잡념으로 복잡하기만 하다.

 아이들이 면회를 왔다. 막내가 작은 선물상자를 내민다. 막내와 내가 가끔 썼던 교환일기에 정성 가득 사랑스러운 편지글이 있고, 큰딸이 만든 아로마 로션, 그리고 하트 모양 형광펜이 고이 놓여 있다. 마음 씀씀이가 이제 다 자란 것 같아 기특하다. 며칠 전, 응급차에서 보호자 역할을 톡톡히 해낸 둘째 아들도 마찬가지다. 안부전화를 해놓고 민망해서일까 치킨 사달라고 엄한 소리를 하지만 몸으로 힘으로 엄마를 돕는 건 늘 둘째 아들 몫이었다. 아롱이 다롱이 아직 다 여물진 않았어도 이젠 제법 알이 꽉 찬 열매가 되어가는 모양새다.


환골탈태

 침 치료를 받는다고 침대에 엎드려 있는다. 평소 서예를 즐기신다는 의사 선생님이 써놓은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한자를 보고 저것을 어찌 읽지 고민하다 무식함에 자책하고 용감하게 아는 한자샘께 여쭤본다. <환골탈태>. 자상하게 일러주시고, 내 사정을 듣고는 본인도 20대 때 얻은 디스크와 평생 친구로 살살 달래며 지낸다 하신다. 시어머님도 그렇고 친정엄마도 그렇고 연배 있으신 어른들은 새로울 것도 없는 병이지만 그들이 겪은 고통이기에 몇 배나 공감해주시고 따스하게 위로해주신다. 어른들도 다 이겨내는 이 병을 아니 견디어내는 이 병을 나만 호들갑 떠는 게 아닌가 죄송스러운 마음도 든다. 조용히 네 글자를 가슴에 새기며 다시 한번 읽어본다.

환골탈태:
몸과 마음이 이전에 비하여 새롭고 아름다워짐.

빨간 불엔 무조건 멈춤

: 내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는 자세


 내 인생의 가을이 오고 있다. 내 몸의 가지마다 삼 남매라는 열매도 키워냈고, 우리 반 우리 학교라는 곳에서 책으로 축제로 자치로 혁신으로 총천연색 꽃도 피워냈다. 열심히 살아낸 여름 끝에 돌아보니 몸도 마음도 앞으로 기울어져 부러지기 일보직전이다. 열매를 떨구고 몸과 마음을 이전과는 다르게 다듬고 추슬러야 환골탈태할 때가 내게도 온 모양이다. 뭐든 내가 해내려고 웬만하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버텼던 여름 같은 싱싱한 때가 지나가고 있다. 좋은 음식과 채소로 천천히 먹고 즐겁게 운동하며 몸을 가볍게 하고, 쉬지 않고 뭔가 하려 하던 과속 엔진의 속도를 늦추고 쉬엄쉬엄 여유 있는 마음으로 새로운 계절을 맞이 해야할 때가 됐다.

아이들은 커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내 몸은 쇠약해지고 있으니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도움을 요청하는 연습을 해보려고 한다. 잘 익은 내 아이들을 마음에서 내려놓고 나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일의 책임감도 내려놓고 쉼 없이 생각했던 자잘한 고민들도 내려놓고 가벼운 몸으로 내 인생의 가을을 두 팔 벌려 맞이하려 한다. 달리지도 뛰지도 않고 천천히 내 몸의 속도에 맞춰 걸어보련다. 느린 속도에 지치고 맘대로 안돼서 속상한 날들도 있겠지만 욕심내지 말자.


한동안 폭우가 퍼붓던 하늘이 맑갛게 얼굴을 내민다. 머리칼을 흔드는 바람도 부니 그것도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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