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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Dec 03. 2022

둥글게 살아가는 고단함

<중년의 진로 수업 : 상처 난 나를 마주하기>

오랜만이에요.
저 장학사 됐어요.


예전에 같이 마을공동체를 했던 엄마이자 교사인 지인들과 오랜만에 연락을 한다. 그녀들은 늘 소리 없이 자기 일을 묵묵히 하던 사람들이었다. 들이 조용히 공부를 하고 준비해서 떡하니 전문직으로 이직을 했다 한다. 쉽지 않은 과정임을 알기에 더욱 대단하고 멋져 보인다.


작아진 나를 직면하기

그러다 문득, '난 뭘 했지?' 갑작스레 나를 돌아본다. 6년 동안 마을공동체를 하고 학교서도 열심히 일을 했지만 난 같은 자리다. 오히려 지금은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모든 걸 멈춘 상태. 이 상태를 잘 지키는 것만도 대단하고 감사한 일이지만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6년 나 혼자 말고 동네 아이들, 가족들과 같이 잘 살아보자고 독서와 체험을 실천하는 마을 공동체를 꾸리고 운영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세월의 노력과 애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병든 몸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가끔 쓸쓸한 기분이 .


찬란했던 빛, 긴 그림자


세상에 있는 수많은 바퀴 중에 아주 작은 톱니일지라도, 작은 내 역할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바쁘고 힘들지만 즐거웠고 일은 많아도 의미를 찾으며 시간을 쪼개 신나게 움직였다. 빛나던 시간이었다.



남들이 뭐라 해도 내가 당당하면 돼.
남들이 몰라줘도 내 스스로 인정하면 되잖아.


 남들에겐 이렇게 쉽게 얘기했지만 나는 남들이 뭐라고 비난하는 걸 힘들어했고, 애쓴 나를 몰라주는 걸 서운해했다. 쉽게 던지는 작은 비판도 지나가는 한숨도 내 탓인 것 같아 자책하고 화를 내고 좌절했다. 물론 비난의 화살은 밖이 아닌 내 자신을 향해서. 왜 그랬을까.


다양한 사람들의 요구를 맞추고 조율하고 그들의 개성을 수용했다.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이나믹하게 운영됐지만, 몇몇은 더 잘하라고 더 내놓으라고 몰상식하게 덤벼들었다. 때로는 교묘하게 나를 이용하기도 했다. 열심히 살았지만 힘 조절과 거리두기에 실패한 것이다. 아마추어처럼. 전력 질주하는 100미터 달리기를 하다가 결승선에 딱 멈추어 서기 힘들어 한참이나 멀리 뛰어가다 숨을 헐떡거리며 에너지를 소진하고 텅 빈 운동장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그랬을까. 결국 번아웃이 왔다.


둥글둥글 사는 버거움.
제가 그동안 너무 모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이제 좀 둥글둥글 살려고요.

아니, 그러지 마. 그러다가 뾰족한 모서리가 자기 자신을 찌를지도 몰라.


독서모임을 하다가 지인 한 명이 '좋은 어른되기'라는 주제로 먼저 얘기를 꺼냈다. 그녀가 한 말에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우리는 둥글게 모나지 않게 사는 것이 최대의 미덕인 줄 알고 살아간다. 그런데 누구는 그 믿음을 신처럼 지키고 누구는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이용한다. 더 동그래지고 더 수용하라고 무리한 요구를 당연하게 말이다. 그런데 나는 그 무리한 요구를 바보처럼 따랐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나만의 사명감으로. 무리한 요구에 멍들었고 할 말을 잃었으며 아팠다. 거친 말들을 며칠이고 곱씹다가 화내고 결국 똑바로 대처 못한 나 자신을 자책하고 매몰차게 대했을 뿐이다. 이젠 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작은 신호 하나에 왈칵 쏟아져 나온다. 결국 속절없이 울먹이고 만다.


미덕의 덫

둥글둥글 둥근 사람이 되어야 된다고 믿는 사람결국 세상 모든 모난 것들에 찍히고 꺾여 형체를 알 수 없는 모양이 되곤 한다. 둥글지 않은 것들자신들의 모양에 맞추라고 상대의 둥그러워짐을  강요했던 건 아닐깨닫는. 그런 미친 요구에 유연하게 바꾸지 못하는 나를 자책하며 살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과 다른 모양이라고 왜 떳떳하게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을까. 미덕의 덫에 빠지고 만 것이다. 자신은 바꾸지 않으면서 상대의 생김을 탓하며 따졌던 그 사람들에게 나는 왜 화내지 못했을까. 그저  자신의 모양과 형태를 잘 지키고 서로 부딪히지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살거나, 나와 딱 맞는 모양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 살아가는 것이 현명했을 텐데. 

모난 세모가 동그라미를 콕콕 찍어 밀어내고 상처 내는 일이 흔하지 동그라미가 세모를 나무라는 일은 극히 드물다. 모난 이들이 그들의 모난 성격은 그대로 두고 둥근 사람에게 맞추지 않는다고 한 건 아닐까.


나에게 맞는 사람을 찾지 않고 모두에게 나를 맞추려 했던 불가능한 이상은 결국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나를 만들어냈다. 맞지 않고 뽀쪽한 모서리를 들이대는 사람들은 품고 안아주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아니었다. 아프면 밀어내고 멀리 떨어져야 맞는 것이다. 어쩌자고 나는 모난 사람들을 품으며 아프다고 우는 나를 징징댄다고 몰아세우며 자책하며 살았을까.


본래의 내 모양을 찾아내기

나는 나대로의 모양을 정확히 찾아내야 한다. 각자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출 때 빈틈없이 촘촘히 하나의 큰 톱니가 되어 세상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각자 자기의 모양과 형태에 맞게 묵묵히 살아가는 성숙한 공동체를 나는 꿈 꾼다. 모두 똑같이 둥근 모양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서로 다른 모양이 각자의 형태에 맞게 다른 부족한 면을 채우고 서로 다른 곳을 딱 맞추기 위해 기다리고 대화하는 성숙한 사람들과의 모임, 그것이 내가 꿈꾸는 두 번째 공동체의 모습일 것이다.


지금은 잠시 무너진 내 형체를 돌보고 꺾인 가지를 세우고 벌레 먹은 구멍을 수술할 귀한 시간이다. 이제는 남들의 무리한 요구에 온전한 내 형태를 누르고 고치는 바보 같은 일은 다신 하지 않으려 한다. 쉽진 않겠지만, 다른 이의 모난 각이 아픈 곳을 더 찔러 내 형태가 무너지지 않도록 두 눈 똑바로 뜨고 나만의 각과 형태를 갉고 닦아내 완성하는 일에 열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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