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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Dec 19. 2022

끼어있는 중년, 낯선 그 이름

The 6th 백. 백. 백일잔치 × 고교 동창


 오늘은 고교 동창들이 우리 집에 오는 날이다. 이사하고 집들이 겸 먼 길을 용기 내어 와 주기로 했다. 친구들이 모두 서울을 중심으로 정확히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살아서 시간뿐 아니라 장소도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데 작년, 올해 가끔 친구들이 생각나면 미술관 나들이제안했었다.  친구들은 망설임도 없이 모두 흔쾌히 'Yes!'를 외쳤었고 덕분에 일 년에 두세 번씩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이 한창 어릴 때는 엄두도 못 내던 홀로 나들이를 이제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코로나가 없었던 12월에는 누구나 꽉 찬 스케줄표에 거리마다 상점마다 왁자지껄 모임에, 회식에 즐거운 기분이 넘실거렸었다. 지난 2년간 잃은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아닐까.


그때 그시절 교복

고교시절, 남색 교복 엉덩이 부분이 닳아 번쩍번쩍해진 치마를 똑같이 입고서 명동시내를 깔깔거리며 다니던 친구들이었다. 그녀들이 이제는 4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 중년이 되어 다시 모였다. 초록, 빨강 드레스코드에 작은 머리띠 하나만 했을 뿐인데 깔깔거리며 웃고 즐거워하는 건 그때와 똑같다. 그런데 이야기 주제가 그때와 달리 왠지 모르게 웃픈 구석이 있다.


 품을 떠나려는 아이, 아이가 되어가는 부모님
우리 큰애는 방에서 나오지도 않아. 집에서도 카톡으로 얘기하거나 전화를 해야 겨우 나온다니까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 어려서는 좀처럼 엄마품을 떠나지 않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신만의 영역을 정해놓고 철저히 부모의 침입을 경계하고 거부한다. 게다가 보는 것도 하는 것도 모두 달라서 재밌는 소재를 찾아 대화하는 것도 힘들고 이 와중에 겨우 한두 마디 하는 것이 "빨래 나놔라. 숙제해라. 일찍 자라"하는 잔소리뿐이니 소통의 간극을 좁히기는 상당히 어려운 면이 있다. 행여나 말을 건네도 날카로운 반응이거나 냉소적인 단답이거나 건조한 대화의 흐름에 종종 마음이 헛헛해지곤 한다. 아마도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아이라면 10에 9는 공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갑자기 아빠한테 전화가 오면 철렁하잖아.
안 보면 걱정되고 보면 답답하고
짜증 나고, 그런다니까.


아이들의 냉대에 한숨 쉬고 돌아서니 전화벨이 울린다. 큰 산처럼 버티시던 아버지가, 뭐든 척척 해내시던 엄마가 어린아이처럼 작은 일도 혼자 못하시게 된 것이다. 가슴이 철렁한다. "휴대폰이 이상하다. 티브이가 안 나온다."며 수시로 전화를 거시곤 한다. 그런데 이건 귀여운 수준. 암에 백내장에 뇌졸중에 듣기만 해도 무거운 병이 연로한 부모님들을 찾아왔단 말엔 그야말로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다. 그간 고생했던 몸에 큰 질병들이 들이닥치는 건 당연한 일일까. 아픈 통증에 힘들어할 부모님의 고통을 헤아리기도 전에 입원에  병원 투어에 딸들이 이래저래 소환되니 긴 병에 효자 없다고 가끔 철없이 나도 모르게 싫은 내색을 하고 만다. 그리고  돌아서 오는 길에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데 내 몸도 이상하다.
너 얼굴 안 좋아 보여. 너무 창백한데.
빈혈 수치가 몇이야?

이 친구는 빈혈, 저 친구는 디스크. 꿋꿋하게 살림하고 씩씩하게 아이들을 돌보던 우리들의 건강에도 빨간불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너도 나도 아픈 증상에 좋은 병원에 효과 좋은 약에 대한 정보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슬금슬금 고장 나는 내 몸에 적응하기도 어려운데 여기저기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더 많아진다. 어른 노릇을 해야 하는데 김치도 된장도 못 담그는 내가 우리 엄마처럼 이것저것 퍼줄 수 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장례식도 제사 순서도 모르는 내가 큰 일 닥치면 아빠처럼 묵묵히 해내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갑작스럽게 훅 다가온 새로운 걱정에 아무것도 못하는 40대 중반으로 많아진 내 나이가 어색하기만 하다. 우리 엄마, 아빠도 이렇게  힘들고 어려웠을까.


끼어있는 나, 중간에 선 나, 낯설다.


뭔지 모르지만 배워야 했던 10대, 뭔가 도전하려 애쓰던 20대를 지나, 순식간에 결혼, 출산, 육아 뭔가 너무 많은 것을 해버린 30대, 이제 한숨 돌리고 뭔가 해볼까 하는 40대가 되자, 아프기 시작하는 몸, 치고 올라오는 아이들, 기대기 시작하는 부모님 틈 사이에 어색하게 중년의 우리가 서 있다. 내가 안아주기만 하면 포옥 안기던 아이들은 없다. 내가 힘들면 기댈 수 있던 부모님도 사라졌다. 서서히 아프고 힘든 내 몸만이 낯설게 남아있다. 이제 나를 지켜주고 위로해줄 사람은 누굴까.


같은 걸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사람들

  갑작스러운 내 병의 무게도 부담스러운 부모의 보호자 역할도 치솟는 물가에 이자에 힘든 경제사정에 구구절절 부가설명을 하지 않아도 "아. 맞아. 나도 그래." 눈 마주치며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다."야. 그동안 애 많이 썼다." 토닥여 주는 사람들이 있다. "더 잘하려 애쓰지 마. 지금도 충분해." 위로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말들을, 이런 공감을 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했었다. 가물어진 땅에 단비처럼 쩍쩍 갈라진 내 마음속에 친구들의 마음 담은 한마디가 깊게 스며든다.  마음이 순식간에 부들부들 촉촉해진다.  


문득,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혼자가 아니다. 나처럼 힘들고 나처럼 짜증 고 나처럼 화내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었다. 고작 일 년에 두세 번뿐이지만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무슨 얘기든 '아'하면 '어'하고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었, 눈치 보지 않고, 성내지 않고,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   순간 나는 아무 걱정 없던 고교시절, 1990년대 명동으로 순간 이동하고 있었다. 만나서 웃고 토닥일 수 있는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다정하고 친근함의 힘이 낯선 중년의 나를 맞이할 뜻밖의 힘을 준다.  


아우야. 너무 재밌다. 어떡하면 좋아.


그날 오후, 하하호호 호들갑스러운 웃음소리, 작은 이벤트 하나에 들뜬 목소리가 흰 눈과 함께 소복소복 쌓여가고 있었다.

활짝 웃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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