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요일 Mar 15. 2023

내겐 너무 완벽한 오후

<중년의 진로수업>

아침 8시.

새벽부터 씻고 준비했지만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2시간 남짓 떨어진 병원에 가기 위해선 8시 땡 하고 집을 나서야 한다. 오늘은 오후에도 진료가 있는 날이라 하루 일정이 길다.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산넘고 물건너 도착한 병원, 딱 10시다. 세이프~!



지난 일주일간,

내 몸의 상태를 원장님께 보고 드린다. 월요일에는 신장결석이 말썽을 부려 응급실까지 다녀온 터라 드릴 말씀이 많다. 받지못한 보험금 때문에 속상한 일, 등에 난 종기, 갑상선암 수술 이후의 피로감과 소화 및 수면장애 등등의 증상들... 줄줄이 아픈 곳을 어대는데 말하는 나도 어이가 없어 헛음음이 난다. 내 몸 구석구석에 있던 질병의 씨앗들이 순서대로 튀어나오는 것 같다고 앓는 소리를 하자 원장님께선 허허 웃으시며 "오늘 치료받으면 기운이 겁니다." 말씀하신다. 기운찬 목소리를 듣기만 해도 힘이 나는 것 같다.


기나긴 치료.

암치료에 좋은 주사를 맞고 영양 수액을 꽂고 허리부터 다리 끝까지 침치료를 받는다. 두 시간 정도 치료를 받고 스크램블러치료와 테이핑까지 마치니 어느덧 오후 1시가 훌쩍 지나있다. 꼬르륵~ 속이 요동을 친다. 얼른 식당에 가서 간단히 점심을 먹는다. 이제서야 하늘이 보이고 날씨도 느껴진다. 어디든 놀러가고 싶은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봄날씨다.


[일상온기]

좋은 봄날이라 병원에서만 하루종일 보내기는 아까워서 오후에 예약해 둔 진료 전까지 잠시 짬을 내 찜해두었던 갤러리를 찾아가볼까하고 위치를 검색해본다. 마음이 바뀔세라 얼른 택시를 타고 이동한다. 마침 갤러리는 석촌호수가 코앞에 보이는 곳에 있다. 미술관보고 산책하면 참 좋겠다. 다음 코스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니 더욱 좋다.


머문자리, 장지에 채색, 박윤지

"앨리스달튼브라운"이 생각나는 반짝이는 찰나의 순간을 그린 박윤지의 그림은 봄날에 어울리는 밝고 깨끗한 느낌이다. 빛이 스며든 나른한 오후의 분위기 그대로를 그림으로 표현했는데 과하지 않아 좋다.

Still Life, 박윤지
3:23 pm., 2:50pm, 2:55pm.,4:35pm., 박윤지


작업의 시작은 빛이 만들어내는 순간들을 수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령 일상에서 마주치는 창문 속
순간 지나가는 빚덩어리, 창 건너편에 흔들리는 나뭇잎, 녹색빛이 나는 유리, 기울어진 그림자들.
그것들은 한데 모여 있다가 몇 걸음 자리를 옮기면 금세 모양을 달리한다.
(화가 박윤지)




멍하니 우두커니

미술관 밖을 나오니 그 유명한 송리단길이다. 잠실의 석촌호수 주변으로 맛집과 카페가 즐비하다. 야외테라스가 멋진 카페 하나를 선택해 볕이 좋은 자리에 앉는다. 좋은 곳에 혼자 오니 같이 왔으면 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스친다. 카페는 뭐니 뭐니 해도 하하 호호 웃으며 수다 떨 수 있는 친구랑 같이 오는게 최고다. 떠오르는 친구들에게 나중에 같이 오자며 카페사진을 찍어 공유하고 톡수다를 잠깐 즐긴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펴보니 풋풋한 20대 친구들은 삼삼오오 앉아 셀카 삼매경이다. 나는 아무리 잘 찍으려 애써도 절대 이쁜 각도로 자연스러운 표정짓는 안되는데 어쩜 저리도 멋진 표정과 각도로 포즈를 취하는지 아무렇게나 찍어도 모델 같은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아마도 젊어서 그렇겠지. 씁쓸하지만 조용히 내 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으니 부러워하진 않기로 한다.



평소엔 먹지도 않는 설탕이 가득 뿌려진 도넛을 하나 사서 베어문다. 단맛이 스미기전에 쓴 커피 한 모금을 서둘러 마신다. 캬~ 맛이 끝내준다. 이렇게 한가한 오후를 즐길 수 있다니 더이상 바랄게 없다.  할일 없이 두리번거리다가 길가에 지나가는 고양이랑 커플들을 구경하는 한가로움에 빠져 . 그러다 문득, 가끔 갖는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내게 더 좋은 치료가 아닐까 근거 없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저런 공상을 즐기다보시간이 훌쩍 지나 두 번째 병원으로 향할 다. 바쁜 걸음으로 먼 길을 돌아 석촌호수 주변을 산책하고 아기자기한 골목을 구경하며 걷기로 한다. 한참 길을 걸었는 데도 훨~씬 덜 힘든 이 느낌 뭐지?! 음~ 내겐 너무 완벽한 오후였.

매거진의 이전글 얇은 귀, 쉬운 사람이 얻은 뜻밖의 선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