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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귀, 쉬운 사람이 얻은 뜻밖의 선물

<중년의 진로수업>

by 화요일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어디든 어울려다니기를 더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지금도 별반 다를 것은 없다. 국민학교 6학년때부터 풀던 학습지는 나의 유일한 읽을거리였고 할 것이었다. 몇 장 읽고 공부해가면 좁은 교실에서 손을 들고 대답하고 칭찬받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공부라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부자체가 재밌었다기 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이 좋아 공부를 하게 된 같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mbti의 E(외향적)의 성향이다.


오늘은 아이들과 산책 삼아 대학캠퍼스투어를 했다. 우연히 발견한 책홍보 매대, 습관처럼 이런저런 책을 둘러보고 아이들이 고른 책 서너 권을 들고 결재하려고 내민다. 책을 건내받은 직원은 이때가 기회다하고 두꺼운 계간지 <창착과 비평>를 정기구독해서 보라며 친절하게 꼬드긴다. 대학시절 읽고 싶어도 읽히지 않았던 이 책의 난해함을 떠올리며 흔쾌히 Yes도 딱 부러지게 No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나. 직원은 재빠르게 큰 딸의 높은 독서취향을 칭찬하며 "학생, 이 책 읽을 수 있지?" 우리 딸은 눈치도 없이 "네. 이 책 읽을 수 있죠" 대답한다. 결국 이 한마디에 지고 말았다. 어느새 1년 48,000원 정기구독에 사인하고 있는 나, 딸이 사겠다던 책 세 권은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서툰 계산을 하고 나름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고 위안하며 책을 한 보따리 사들고 나온다.


내 손에 들어온 무겁고 핑크 한 그것



나에게도 풋풋했던 대학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캠퍼스 주변에는 이렇게 두껍고 무거운 제목의 글이 잔뜩 실린 책을 놓고 홍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번쯤 들리긴 했지만, 제목도 주제도 이해 못 할 무거운 내용에 주눅이 든 채 조용히 책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20년도 훌쩍 지난 지금, 그때 봤던 비슷한 책을 들고 혹시나 하고 책을 펼친다. 헉, 그런데 다르다. 주제는 내가 고민하던 바로 그것이었고, 글은 생각보다 잘 읽혔다. 시간과 경험이 주는 이해력인가, 꾸준히 고전을 읽었던 덕택일까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머릿속으로 막연하게 생각하던 그것을 콕 짚어낸 듯한 작가들의 필력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고, 내가 말하고 싶었던 딱 그것, 딱 그런 느낌을 찰떡같이 글로 표현하고 조리 있게 설명해 주니 답답했던 마음이 탁 풀리는 느낌마저 든다. 친구들과 모여서 떠들고 수다떨기를 더 좋아하던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한걸까. 지적인 내가 되었나, 두꺼운 책한권 읽게 되었다고 호들갑떨며 과잉해석하는 내가 우습지만 대단한 사건이긴 하다.


기후위기에 서정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양경연님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읽어야 할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정지아 작가를 조명하는 글도 눈여겨본다. 그러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든다.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다. 기후위기가 심해지는 이 시기에 텀블러만 사들고 다니면 괜찮은 줄 아는 사람들이 답답했고 마트에는 친환경 제품보다 플라스틱 포장에 소포장으로 작게 더 작게 포장하고 큰 포장으로 또 포장된 물건들을 또다시 큰 비닐에 담아 오는 플라스틱 친화적인 환경이 불만이었다. 이런 무심함은 정서의 무딤에서 기인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인간만 생각하는 이기심도 문제라며 궁시렁하기도 했다. 편리함만 추구하는 이 시대의 문화와 바쁜 일상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서정시를 읽고 수필과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아지면 사람들의 마음이 부들부들해지고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기고 다정하게 환경을 살피는 마음이 살아날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또 있다는 생각이 반가웠고 그동안 조용히 이런 생각들을 모아 책을 내고 있었던 출판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미안하다는 생각까지 들게 된 것이다.


장사꾼의 호객행위에 금방 넘어가는 쉬운 사람이 되어 마지못해 무거운 책을 1년 구독하게 되었지만

이제라도 이런 글을 읽고 공감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몇 편이나 더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시대를, 우리 상황을 읽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의 정리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든든하다. 얇은 귀에 지갑도 늘 얇지만 가끔은 얇아진 지갑만큼 내 생각이 풍성해지고, 마음의 포근해지는 횡재를 만나기도 한다. 매달 후원하는 기부처가 늘어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책 구독까지 하는 경제관념 없는 아줌마라는 불명예를 면키는 힘들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핑크색 두꺼운 책 들고 카페에 앉아 우아하게 책 읽는 된장녀 캐릭터로 깔끔하게 마무리해야겠다. 남이 뭐라든 내 돈의 주인은 나고 쓰는 만큼 가치가 있다면 괜찮은 소비 아닐까, 누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스스로 답한다. 나라도 꾸준히 이런 책을 읽다보면 어제보다 나은 생각으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않나 섣부른 상상하며 봄날같은 분홍빛 책의 페이지를 휘리릭 넘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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