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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Mar 14. 2023

얇은 귀, 쉬운 사람이 얻은 뜻밖의 선물

<중년의 진로수업>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친구들과 어디든 어울려다니기를 더 좋아하는 평범한 아이였다. 지금도 별반 다를 것은 없다. 국민학교 6학년때부터 풀던 학습지는 나의 유일한 읽을거리였고 할 것이었다. 몇 장 읽고 공부해가면  좁은 교실에서 손을 들고 대답하고 칭찬받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면서 공부라는 것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공부자체가 재밌었다기 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이 좋아 공부를 하게 된  같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mbti의 E(외향적)의 성향이다.


오늘은 아이들과 산책 삼아 대학캠퍼스투어를 했다. 우연히 발견한 책홍보 매대, 습관처럼 이런저런 책을 둘러보고 아이들이 고른 책 서너 권을 들고 결재하려고 내민다. 책을 건내받은 직원은 이때가 기회다하고 두꺼운 계간지 <창착과 비평>정기구독해서 보라며 친절하게 꼬드긴다. 대학시절 읽고 싶어도 읽히지 않았던 이 책의 난해함을 떠올리며 흔쾌히 Yes도 딱 부러지게 No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던 나. 직원은 재빠르게 큰 딸의 높은 독서취향을  칭찬하며 "학생, 이 책 읽을 수 있지?" 우리 딸은 눈치도 없이 "네. 이 책 읽을 수 있죠" 대답한다. 결국 이 한마디에 지고 말았다. 어느새 1년 48,000원 정기구독에 사인하고 있는 나, 딸이 사겠다던 책 세 권은 선물로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서툰 계산을 하고 나름 나쁜 거래는 아니었다고 위안하며 책을 한 보따리 사들고 나온다.


내 손에 들어온 무겁고 핑크 한 그것



 나에게도 풋풋했던 대학시절이 있었다. 그때도 캠퍼스 주변에는 이렇게 두껍고 무거운 제목의 글이 잔뜩 실린 책을 놓고 홍보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번쯤 들리긴 했지만, 제목도 주제도 이해 못 할 무거운 내용에 주눅이 든 채 조용히 책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20년도 훌쩍 지난 지금, 그때 봤던 비슷한 책을 들고 혹시나 하고 책을 펼친다. 헉, 그런데 다르다. 주제는 내가 고민하던 바로 그것이었고, 글은 생각보다 잘 읽혔다. 시간과 경험이 주는 이해력인가, 꾸준히 고전을 읽었던 덕택일까 알 수는 없지만 내가 머릿속으로 막연하게 생각하던 그것을 콕 짚어낸 듯한 작가들의 필력은 실로 놀라운 수준이었고, 내가 말하고 싶었던 딱 그것, 딱 그런 느낌을 찰떡같이 글로 표현하고 조리 있게 설명해 주니 답답했던 마음이 탁 풀리는 느낌마저 든다. 친구들과 모여서 떠들고 수다떨기를 더 좋아하던 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한걸까. 지적인 내가 되었나, 두꺼운 책한권 읽게 되었다고 호들갑떨며 과잉해석하는 내가 우습지만 대단한 사건이긴 하다.


기후위기에 서정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양경연님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앞으로 읽어야 할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정지아 작가를 조명하는 글도 눈여겨본다. 그러곤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든다. 혼자만 이런 생각을 하는 줄 알았다. 기후위기가 심해지는 이 시기에 텀블러만 사들고 다니면 괜찮은 줄 아는 사람들이 답답했고 마트에는 친환경 제품보다 플라스틱 포장에 소포장으로 작게 더 작게 포장하고 큰 포장으로 또 포장된 물건들을 또다시 큰 비닐에 담아 오는 플라스틱 친화적인 환경이 불만이었다. 이런 무심함은 정서의 무딤에서 기인한 거라고 생각했었다. 인간만 생각하는 이기심도 문제라며 궁시렁하기도 했다. 편리함만 추구하는 이 시대의 문화와 바쁜 일상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서정시를 읽고 수필과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조금 더 많아지면 사람들의 마음이 부들부들해지고 주변을 살필 여유가 생기고 다정하게 환경을 살피는 마음이 살아날 것만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또 있다는 생각이 반가웠고 그동안 조용히 이런 생각들을 모아 책을 내고 있었던 출판사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미안하다는 생각까지  것이다.


장사꾼의 호객행위에 금방 넘어가는 쉬운 사람이 되어 마지못해 무거운 책을 1년 구독하게 되었지만

 이제라도 이런 글을 읽고 공감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몇 편이나 더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시대를, 우리 상황을 읽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의 정리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든든하다. 얇은 귀에 지갑도 늘 얇지만 가끔은 얇아진 지갑만큼 내 생각이 풍성해지고, 마음의 포근해지는 횡재를 만나기도 한다. 매달 후원하는 기부처가 늘어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구독까지 하는 경제관념 없는 아줌마라는 불명예를 면키는 힘들겠지만 기왕 이렇게 된 김에 핑크색 두꺼운 책 들고 카페에 앉아 우아하게 책 읽는 된장녀 캐릭터로 깔끔하게 마무리해야겠다. 남이 뭐라든 내 돈의 주인은 나고 쓰는 만큼 가치가 있다면 괜찮은 소비 아닐까, 누가 묻지도 않은 질문에 스스로 답한다. 나라도 꾸준히 이런 책을 읽다보면 어제보다 나은 생각으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지않나 섣부른 상상하며 봄날같은 분홍빛 책의 페이지를 휘리릭 넘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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