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화요일 Oct 20. 2023

뻘쭘해서 좀 그랬어~

중년의 진로수업

오늘, 우리 모두 너무 애썼으니
다 같이 조퇴 쓰고 치맥 갈까요?

(썰렁)


이런 재미가 좋았다. 뭔가 고단한 일을 마치고 나면 동료들과 간단하게 한잔 하는 거. 길게도 아니고 딱 한두 시간만~그 자연스러운 일이 참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맑은 하늘 최상의 텐션, 체육대회 현장

오늘은 체육대회날,

어제는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온종일 칙칙한 하늘빛을 보이더니 오늘은 이렇게 맑다. 체육대회를 절대 연기하면 안 된다는 아이들의 소원이 통하기라도 한걸까. 늘 교실에서만 수업을 하는 나는 오랜만에 운동장에서 점수를 계산하고 순위를 정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았다. 뜻밖의 고민은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였다. 출근 전, 옷장 앞에 서서 한참 고민해서 힘들게 고른 옷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아침은 지독하게 춥고 오후는 지독하게 화창한 날은 너무 오랜만이잖아요~' 오전에는 너무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제일 안친한 숫자와 씨름하고 긴장했는지 고작 반나절 경기가 끝났을 뿐인데 기진맥진하고 말았다. 심상치 않은 컨디션의 변화에 불길한 예감이 들고. 하루종일 애쓴 체육선생님들 앞에서 '조퇴'를 외쳤으나, 민망한 음소거에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다. 이런 시점에 교장선생님의 멋진 멘트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선생님들,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하셨어요. 제가 학교는 지킬 테니 조퇴하시고 일찍 들어가 쉬셔요.


하지만, 현실에는 없다. 애매한 분위기를 읽으셨는지 교감선생님은 "힘드신 분들은 조퇴 올리시고 가셔요." 했으나,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건 나뿐이었음을 몇 분 후에알게 되었다. 나만 조퇴를 신청한 것이다. 주섬주섬 짐을 싸서 교무실문을 열고 나오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


이전 학교에서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 교장선생님께서는 종종 거국적인 조퇴허가주셨다. 그럼 선생님들은 너도 나도 신이 났었다.  연가일수에서 하는 조퇴에, 고작 30분 일찍 퇴근할 뿐이었지만 그 해방감은 꿀맛 같았고. 아이들처럼 기분좋게 학교를 우르르 빠져나가곤 했다.  


그뿐만 아니다. 선생님들과 교무실에서 이런저런 소소한 이벤트도 즐기기도 다. 우연히 모두 초록옷을 입고 온 날, 학교 앞 공원에서 단체사진을 찍으며 까르르 웃느라 턱관절이 나갈뻔한 적도 있고, 내가 추진했던 미술관으로 가는 교원연수가 무산되던 날, 학교 앞 술집 "미술관"에 우르르 몰려가서 위로파티를 했던 따뜻한 추억도 있다. 남에게 수업을 보이는 게 부담스러울 텐데 수업 나눔 콘퍼런스를 하자는 나의 제안도 흔쾌히 오케 해주고, 너도 나도 십시일반으로 도와 일을 척척 진행해서 성공리에 마치기도 했다. 크리스마스날에는 더욱 특별하게 빨강, 초록 드레스코드를 정해 옷을 맞춰 입고 교무실 한 귀퉁이에서 소박한 파티를 하고 재밌는 추억을 남기기도 하고. 늘 내 곁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그 사람들은 지금 없다. 척하면 척하고 알아봐 주던 끈끈한 이들도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번개(모임)를 외쳐도 콜! 을 외치는 동료들도 없다. 허전하다.


아. 내가 새로운 학교에 왔지.

휴직기간 빼면 새 학교로 와서 근무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오늘 일찍 나가지 못하고 근무를 계속 해야하는 선생님들도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급하게 처리할 업무가 있거나 선약이 있을 수도 있고, 나와 덜 친해서 그럴 수도 있고, 학교의 분위기가 달라서 그럴 수도 있고. 안될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일탈을 좀처럼 하지 않는 모범생 집합체가 선생님들인건 알지만 다 그런 건 아닌데. ... 조금 섭섭하다.


새삼 느낀다.

그토록 편했던 예전 직장의 동료들 같은 관계의 신뢰를 쌓으려면 또 그만큼의 세월과 사연이 필요한 거라는 걸, 세상 모든 일이 그리 쉬운 게 아니었지. 여태 같이 지냈던 사람들이 고마웠다고도 느낀다.


익숙한 관계의 습관대로 무리한 기대를 했던 나의 재빠른 행동은 결국, 30분 일찍 병원에 가는 허망한 스케줄로 마무리되었지만 딱 필요한 때, 딱 필요한 (번개) 회식에 대한 갈증은 좀처럼 없어질 것 같지 않다. 술도 못 마시는 종합병원 신세 약골대장되었지만 아직도 뽀로로 마냥 노는 게 좋은 걸 어떡하지~~

매거진의 이전글 높이 날지 않는 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