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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Feb 22. 2023

[몽당 소설]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

선택을 조율하는 무언의 경계에 서있다면, 그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마음이 힘들 때 놓아버릴 것들이 필요했다. 내 안에 있는 안쓰러운 아픔들은 꺼내기 괴로우니 바깥에 있는 내팽개치기 쉬운 것이어야 했다. 나만 놓으면 되고 나 홀로 사라지면 깨끗할 것들로. 그렇게 내가 버린 것들은 주로 사람이었다. 내가 버린 것인지 버림받기를 자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살아남기 위해 가장 무겁고도 유독 까다로운 것들을 내려놓았다. 살 이유를 찾지 못하면서 살 방법은 본능적으로 찾는 행위가 퍽 우습기도 했으면서.     


몇 달씩 내가 버린 어떤 이들과 연락을 주고받지 않고 살다 보면, 내면의 웅크린 서늘함이 점차 가라앉는 것 같은 시기가 왔다. 흙탕물 속 처참하게 가라앉은 흙 찌꺼기처럼. 본래의 자신이 될 수 없는, 초면의 구릿빛이 되어버린 병든 웅덩이처럼. 이제는 나가도 되는 걸까 싶어 뻔뻔하게 턱 한 조각을 세상으로 내놓으면 아무렇지 않게 나를 다시 받아 준 것들이 있었다. 홀연히 여행을 떠났다가 재회한 낡은 지하의 몸짓을 하고 은은한 품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부터 놓아버린 것을 알면서도, 묵묵하고 고요하게 기다린 것 같았다. 언젠간 반드시 돌아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어설프게 둥근 원 안에서 우리는 자주 숨바꼭질을 했다. 누군가 숨으면 합심하여 하나를 꺼내려는 시도를 여럿 반복했고, 그럼에도 고개조차 내밀지 않을 때면 그 자리에서 쉴 수 있도록 가만 두었다. 꺼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외롭지 않다는 것. 혼자만의 싸움을 끝낸 뒤에 따뜻하게 안아 주는 대지의 태양빛 같이. 그것들의 눈동자는 초여름 오후의 햇살처럼 매우 찬란했다. 제아무리 오랜만에 마주한 살갗이라도 소스라치게 놔두지 않았다. 한낱 연민인지 실재하는 사랑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으나, 진심이 어떻든 간에 공허함을 달랠 특별한 손뼉임에는 틀림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위해 종종 마주쳤다. 소리를 냈다. 이유 없이 눈물이 흐를 때에도 그러고 나면 좀 나아졌다.     


서로에게 필요한 건 때로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틈을 내어주는 것. 환상은 착각이나 오해와 비슷한 가루들을 조합해 언제든 만들어 낼 수 있었기에. 텅 빈 가슴께를 메울 수만 있다면, 어떤 무엇이든.     


짐승이 짐승 없이 살 수 없고 꽃이 꽃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사람 없이는 살지 못한다고 했다. 상처를 건네는 횟수와 미소를 건네는 횟수를 비교해 보았을 때, 우리는 그 절망과 멸망의 빈도를 두고 실망의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지만. 그깟 불편한 진실은 정작 아무 소용없는 정의 구현과도 같았다. 우리들은 알면서도 다시 손을 내밀고 끌어안고 상처를 낼 것이었다. 감정의 이음새는 때로 변덕이 죽 끓듯 하여 시시각각 변해왔으므로. 누구에게나 선량하고 좋기만 한 마음은 없었다.     


그러나, 다 알면서도 우리는 기대했다. 저 손길은 좋을 것이라고. 또 편견 지었다. 저 눈짓은 나쁠 것이라고. 결국 나는 힘들 때마다 좋기도 나쁘기도 한 것들을 가장 먼저 뿌리쳤다. 일정하지도 한결같지도 않은 무엇들이 예고도 없이 머릿속을 잔뜩 헤집어 놓기 때문이었다. 구석구석의 살점이 쪼개져 몸 밖으로 이탈하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나는 자꾸 벗어나려 했다. 그들과 같은 종족으로 태어나, 공존해야만 하는 규칙성에 의문을 가지며 칠흑 같은 생각 끝으로 온몸이 잠식되는 순간, 나는 회갈색 천둥이 짙게 깔린 다른 세계의 블랙홀로 굴러 떨어졌다. 멀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았다.  

  

내가 그들을 극도로 경계하기 시작한 건, 내 안의 씻겨질 수 없는 상처의 원천이 그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을까? 어여쁘기도 두렵기도 한 불완전한 것들이 나를, 서로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리하여 내가 싫어질 때면, 나는 나를 버렸다. 그들을 버리려면 그들을 소름 끼칠 만큼 닮아있는 나를 먼저 버려야 했기에. 나를 버렸다는 것은 내 어두운 안쪽과 밝은 겉쪽을 촘촘히 둘러싼 기대의 끈을 놓는 것과도 같았다. 그 끈은 견고하게 엮인 매듭으로 이어져 있었다. 두꺼운 매듭을 풀기 위하여 길가에 쓰러져있는 처연한 시간들을 불러왔다. 무슨 수를 써도 진척이 없어 보일 때에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고 있을 낡은 희망을 담보로 걸었다. 당장 내일이라도 움트려는 새싹을 가져가 바쳤다. 너무 깊은 마음이 모든 풍경을 녹슬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버려야만 살 수 있다면 무엇을 버려야 할까.

얼마 남지 않은 기억을 지불하는 짓은 그만두고 싶은데.

새로운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잃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난 뒤의 나는, 아마도 내가 아니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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