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의 천사

by 블루나잇

멸절. 그 애는 그걸 바랄 때마다 텅 빈 운동장 한가운데에 을씨년스럽게 서있곤 했다. 비가 내리는 날마다 어김없이 거기에 서서. 우산도 쓰지 않은 처연한 눈빛으로. 그 애의 걸음을 타고 비가 내리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방이 진흙인데도 그 애의 운동화는 심상치 않게 깨끗하였고. 햇살을 닮은 과자를 먹다가 느지막하게 걸어 나온 것인지 입 주변엔 화사한 부스러기가 달갑게 붙어있었다. 잃고 싶지 않아서 사랑하지 않는 법을 공부한다던 어느 해 무렵이었다. 가지 잃은 나무들이 서로를 향해 없는 손가락을 내뿜을 때. 그 애가 비를 몰고 비를 몰지 않고 비가 있든 없든 한동안 같은 시각을 제자리에 서있지 아니하였을 때. 사람들은 정신 놓은 길가의 풀잎들처럼 동공 없는 얼굴을 하곤 가난하였다. 마음이 가장 굶주린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어린 손짓 한 번에 골몰하며 어기적거리던 다리들이 흰 꿈을 잃어갔으므로. 끊어졌다. 끊어지지 않았다.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만 두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그 애를 보았다. 이제는 오지 않는 그 애를. 그 애는 최근에 내 곁에 머무른 적이 있다. 이제 내 두 발과 두 다리와 두 팔과 두 눈은 하염없이 비에 젖어 내릴 것이다. 그 애가 내렸는지 내리지 않았는지 어쩌면 홀로 내리게 될 빗속으로 빗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내 구두는 온통 진흙이었다. 나는 그 애가 아니었다.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서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계절이었다. 때 이른 봄비에 땅바닥이 축축하게 젖어들어가고 만물이 태어나는 와중에도 오직 어떤 숨결 하나는 죽어갈 때. 태어나기 전으로 돌아갈 때.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거나 떠올리지 못하게 되었을 때. 아주 없는 것이 되었을 때. 그 애가 말하는 절멸이 무엇인지. 나는 알게 되었다. 우리들 중 누구도 다시는 그 애를 읽지 않았다. 숨겼다. 멸절과 절멸 사이에서. 의미 없는 눈동자로 살아가는 이들을 원망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 애는 눈을 감아도 보이지 않았다. 영영 떠나간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행복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울지 않을 것들 때문에 울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울게 될 것들 또한 여전히 우리를 울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keyword
이전 11화사랑스러운 염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