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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나잇 Jul 04. 2023

[몽당 소설] 비의 신

내가 기억하는 당신, 당신이 기억하는 나. 우리의 우리.

빗물처럼 흐르는 눈빛으로 당신이 나를 바라보았을 때. 촉촉이 젖은 입가를 느릿하게 열며 나에게 사랑한다 말했을 때. 그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이어가지 않았을 때. 부유하는 침묵 사이로 우리가 우리를 주시하곤 했던 때.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미워해. 너무 사랑해서 미워하게 돼. 어렴풋이 투정 같은 말을 입에 올려도 곱게 휘어지던 반달 모양의 눈. 경쾌한 머리칼이 버석거리며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흔들리고. 우리는 여전히 비슷한 농도의 몸짓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고.      


비 내리는 날, 다시 만나자고 했던 말을 나는 기억해요.     


비스듬히 팔 한쪽을 베고 누운 나는 그 해 여름에 생긴 새로운 취미를 줄줄 읊어대는 날이 잦았는데, 그는 내 찢어진 영수증 같이 두서없는 얘기들을 무리 없이 소화시키곤 했다. 물에 타서 잘게 갈아 마시는 것 같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 천장에 구멍이라도 뚫린 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로 당신과 눈을 한 번 더 맞추고 싶었던 때. 당신과 나 사이에 어렴풋이 흘렀던 이야기가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자신을 지배하는 순간마다 그는 녹음해 둔 빗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툭툭툭 한 방울씩 저며드는 그 음성을 귓가에 담고 나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말하면서.     


어느 날 나는 당신과 집 앞 놀이터에서 우산을 쓰고 쪼그려 앉아, 일곱 살 어린애들처럼 손바닥 두 개를 겹쳐 모아 빗물을 담고 있었다. 정확히는 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기록하고 싶었다. 우스울 정도로 우리의 손바닥은 큼지막해 보였다. 멀대 같이 키가 컸던 당신은 몸을 한참 줄여도 위로 훌쩍 튀어나오기 일쑤였다. 낯설고도 어렸던 서로에게 잊지 못할 선물을 건네자며 마주 보았던 시간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남아서, 매사 힘에 부칠 때마다 우리를 보드랍게 감싸 안아 주었던 것 같다. 비의 신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아닐까 하는 기괴한 착각에 빨려 들게 만들었던 사람. 그리고 우리는 운명처럼 헤어졌다. 다시 운명처럼 만날 것을 기대하면서. 세상 그 무엇에도 운명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의 빗소리를 꼭 간직해 줘.


타임머신처럼 유년의 기억이 담긴 물건들엔 쉽게 정들 수 있다고 했다. 당신은 내 마음속 작은 구멍을 찾아 자신의 색으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래야 자신이 없어도 내가 자신을 잊지 않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언젠가 반드시 떠날 사람처럼 말했던 그가 나는 환상 같았다. 머물렀던 흔적 없이 자취를 감추는 금빛 아지랑이. 그래서 실감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하루아침에 없던 사람으로 남아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 간밤의 꿈처럼 절절히 다정했던 사랑. 나는 차츰 당신이 되어갔다. 억울했다. 왜 나만 당신이 되어야 하나. 사랑했다. 더욱더 온전한 당신이 되길 원했다. 당신이 내게 주는 사랑이 한 톨이라도 흐를까 봐 조바심을 내기까지 했다. 손 틈 새로 빠져나가는 마음들이 조약돌만큼이라도 존재할 것만 같아 애석하고 애달팠다.     


나는 그날부터, 정확히 말하면 그가 나를 내팽겨 치고 떠난 순간부터 비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떤 날은 사랑보다 미움이 더 커졌다. 길을 잃은 감정들은 훗날 증오로 뒤섞였다. 어쩌면 분노를 동반한 그리움이었다. 하염없는 기다림은 평생을 약속했던 열정을 무너뜨렸다. 희망 없는 희망 고문이 터널 속 빛처럼 점차 희미해지던 무렵. 그리하여 아무 기대도 없이 예전의 당신과 나의 빗물이 꿈결 같던 놀이터를 전생처럼 지나치던 날. 익숙한 우산. 익숙한 신발. 잊지 못한 발소리.     


오랜만이야.     


떠나던 날과 같은 옷차림 같은 모습으로 당신이 서 있었다. 좁은 우산 밖으로 엉망처럼 튀어나왔는데도 하나도 젖지 않은 당신은. 나만 알고 있는 비의 신. 잔뜩 미워하겠노라 다짐했던 억겁의 시간들이 어느덧 우리 밖의 세상으로 퇴출당해 있었다.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마음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기다리던 표정이 나를 많이 닮아있어서. 어쩌면 서글프고 유약한 형체가 오직 당신을 기다렸던 나보다도 더 나 같아서.      


많이 행복해졌을까 당신.     


우리는 못다 한 이야기를 붙잡고 밤새 마주 보았다. 비가 그치고 나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으나 그럴 때마다 서로가 녹음해 두었던 빗소리를 들었다. 소리를 크게 키워 아무것도 우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바깥의 어지럽고 복잡한 언어들이 이곳으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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