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나잇 May 30. 2023

[몽당 소설] 꿈같은 하루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

운동화 앞 코가 부서져라 굽은 발로 땅을 차는 일. 구멍이 뚫리고 찢긴 천으로 둘러싸인 우산에 낯설고 부족한 몸을 가두는 일. 해가 바깥으로 쏟아지듯 뜨거운 날 새까만 옷을 입고 더위를 피하는 일. 치유성이 단 한 구석도 없는 장식용 비누로 때를 빼고 광을 내는 일. 울고 싶어도 흘릴 눈물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던 일. 아무래도 소용없는 존재 부정의. 노력이 부질없어지는 슬픈 일.     


손톱에 거칠게 피어난 거스러미 같다더라. 잘라내고 잘라내어도 주제 모르고 다시 자라나는. 내게 기필코, 악착같은 년이라 칭하며 비웃었지. 그래서 싫었대. 올라갈 높이도 모르면서 자꾸만 떠올라, 입가의 자연스러운 주름처럼 아무 몸덩이에 붙어 기생하는 내 정체성이 기분 나쁘다면서.    

 

그 애들은 나를 미워해. 내가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지른 거겠지. 그 애들은 나를 미워해. 그런데 나는 이유를 몰라. 아마도 너무 많은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일 거야. 그 애들은 나를 미워해. 그 애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 그리고 나는 아파.      


나를 미워하는 그 애들을 피해 숨었어. 빛이 없는 곳에 그늘을 두고 미친 사람처럼 거뭇한 동굴을 파기 시작했던 때. 죽어야 한다기에. 그래야 하는 존재라기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생선처럼 펄떡이는 심장을 쥐고, 가만히 숨을 쉬었어. 숨을 죽였어. 그러다 숨만 쉬었어. 모든 게 잘못처럼 느껴지던 날들. 나는 너무 아팠어. 그럼에도, 아프다고 외치는 내 목소리를 들어줄 구원의 당신은 평행선처럼 멀기만 했어.  

   

내 잘못은 대체 뭐였어.     


태어난 거, 네가 너인 거.      


그 애들 중 가장 나를 미워하는 아이가 답 했어.

     

그 애들이 말하는 잘못을, 아니 애초에 그런 잘못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싶었는지도 몰라. 내가 없어져야 끝나는 고통이었으니까. 이유 없는 괄시와 멸시. 경멸과 모욕 같은 것들. 내가 나라서 받아야 했던. 참혹한 흉터. 왜 꼭 나여야만 했는지. 내가 아니라면, 내가 아니었다면. 이 지옥을 누구에게 물려줘야 했을까. 어느 방향을 둘러보아도 결국 나는 죄인이었다. 사실은 진실을 감싸주지 못해. 알려만 줄 뿐이야.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을 수 없는 현실이 있었지. 계속해서 반추되는 불구덩이 같은 삶. 여름이라고 칭하기에 너무 초라했던 작품. 죽지도 않고 꾸역꾸역 살아내던 그때의 나.   

   

지독했다. 징그러웠고.     


사물함을 반 틈만 열어도 입 벌린 팝콘들처럼 우수수 쏟아지던 쓰레기더미. 책상 위에는 의미 모를 욕설이 알록달록 화려한 변장을 한 채 울고 있었지. 비명횡사는 금방이라도 사라질듯한 나를 닮은 것 같았고. 예쁜 것이 예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 애들을 보며 느끼곤 했어. 시시각각 수군거리는 얼굴 없는 목소리. 모든 것들이 불분명한 중에 유독 형체가 분명하던 내 이름. 내 얼굴. 나는 메마른 공기 안에서 아주 투명하고도 오랜 잠수를 다. 억울하고 서글픈 울음으로 살려달라며 잦게 호흡하던. 숨을 참아야만 버틸 수 있었던 시간들.  

 

주변이 모조리 낭떠러지인 기분이었다. 곧 닥칠 거대한 행운 앞에서도 살고 싶은 이유 하나 찾지 못해 그저 쓰러지기를 기대하는 이상한 사람. 사연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을 만큼 보잘것없는 사람. 약속된 내일이 떠오르는데도 겁이 나서 실눈조차 뜨지 못하는 삶. 사는 게 죽는 것만 같아서,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최후 같은 거 말이야. 너희들은 이런 감정 느껴본 적 있을까.      


모처럼 마음이 편안한 날이었어. 내 것도 아닌 행복이 넘실거려서. 그것으로 인해 밝은 색이 곱게 입혀진 내 표정이 무척이나 생경해서. 한 번쯤은 나도. 라는 희망을 품었다가 헛된 거품이란 걸 알고 이내 고개를 젓고 마는. 어차피 나는 자격이 없는 사람인 거지. 미움 앞에서 어떤 이유도 무용지물 되었지만. 괴롭힘에 이유가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괴롭게 만들었으니. 차라리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는 마네킹이 되고 싶었다. 소음처럼. 귀를 멀게 만들고 끔찍한 표정을 안겨주는 어느 날의 쓸모없고 낯설고 날카로운 시선들처럼.     


오늘따라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게 꼭 남의 일 같아. 싱그러운 풀냄새를 타고 연약한 씨앗의 형체로 떠오른 몸체버들잎을 닮아 이리저리 휘청거린다. 마지막 향기. 검붉은 피를 띄운 초여름의 기쁨. 얇고 시원한 리넨 재질의 반팔을 입은 사람들이 긴 팔을 휘적거리며 연신 부채질을 하는 동안에. 하나의 결을 따라서. 천천히 아래로. 그 애들이 보인다. 나를 괴롭히던 얼굴로 미소 짓고 있다. 멍하니 눈만 간신히 뜨고 있는 내게, 일렬로 선 공기의 흐름이 안겨오며. 생전 처음 듣는 상냥한 음성으로 귓가에 속삭였다. 네 잘못이 아니야.      


나는 처음으로 웃어보았다. 태어난 이래로. 이유도 모른 채 모든 행복을 일순간 빼앗긴 나. 나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이대로 끝이 난대도, 어쩌면 괜찮을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온전히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페이지라면. 그리하여 결백할 수 있다면. 내가 웃을 줄 아는 인간이라는 걸, 이 세계의 당신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어.   


그날 새벽엔, 작은 깃털로 태어나는 꿈을 꾸었다. 무엇도 억울하지 않은 밤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몽당 소설] 봄 잔혹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