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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통해 나를] 똑같음의 위대함

2020년 초여름 / 장마가 막 시작되던 시기

by 물꿈

그림 작가 온수와 교육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물꿈이 함께하는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가 만나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눕니다. 멀고 깊은 이야기도, 가깝고 가벼운 이야기도 담습니다.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는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에 공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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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티브이를 보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다. 이렇게 써보니 뭔가 액자식 구성이나 메타인지적 표현 같이 느껴지지만, 매번 아이들이 티브이를 시청하기 시작하면 덩달아 나도 아이들이 티브이를 바라보고 반응하고 있는 모습을 시청하게 된다.


아마도 대부분의 집에서 아이들이 티브이를 붙잡고 있는 것은 제법 골칫거리일 것이다. 게다가 요즘에는 티브이에 연동되어 있는 유튜브까지 한몫 가담해 부모들의 우려는 더욱 커졌다. 그나마 티브이의 콘텐츠는 나름 검증 시스템이라도 있건만 유튜브는 그런 필터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우려 지점이 있긴 하지만 아이들이 집착할 정도가 아니라면 웬만한 티브이 시청은 크게 염려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적어도 나처럼 아이들이 티브이를 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같은 공간에 부모가 존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티브이보다 핸드폰의 영향력이 더욱 절대적일 것이다. 대중식당에 가보면 어지간한 테이블의 아이들은 죄다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다. 나 또한 아이를 키우기에 한 끼라도 제대로 밥을 먹을 방법을 찾는 부모들의 궁여지책인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나와 같은 부모세대와는 또 달리 아이들에게 핸드폰은 이미 생활의 영역이다. 그리고 청소년 시기가 되면 그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핸드폰은 현대의 새로운 주민증이며 아이디이다.


이런 흐름을 돌아보았을 때 나는 아이들이 핸드폰을 쥐고 있는 것보다 티브이 시청이 더 나은 방식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티브이는 핸드폰보다는 훨씬 더 ‘공공의 시간’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물론 각자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면 개인 성향에 의한 다툼은 없겠지만 (어린 시절 티브이 채널 때문에 싸워 본 기억 가정마다 다들 있을 것이다) 티브이는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아'가 가능한 기제이니 경험의 개별화 및 파편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동시에 같이 본다는 것은 같이 이야기할 화재를 획득하는 것과도 같다. 나는 아이들이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개별화를 벌써부터 겪고 싶지는 않다. 아직은 아이들의 시간에 내가 결부되어 있길 원한다.


“끄하하하”


아이들이 티브이를 보며 깔깔 웃는다. 그 웃음소리를 따라 나도 웃는다. 무엇이 그리도 재미있을까 티브이 앞에 달려가 보니 별 내용이 없다. 그런데 아이들은 내가 예측할 수 없는 포인트에서 웃음이 터진다. 아마 나도 지금의 아이들 나이라면 함께 깔깔대고 웃었을까? 그때는 왜 그토록 '지금은 알 수 없는 것'들이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와는 반대로 그때는 재미를 못 느꼈는데 시간이 지나 문득 재미를 발견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에 영상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버린 프로그램이 바로 <그림을 그립시다>이다. 우리 세대에게는 “어때요? 참 쉽죠?”라는 멘트로 누가 봐도 쉽지 않은 그림 그리기 스킬을 선보였던 밥 로스 아저씨가 진행한 교육방송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프로그램이 방영될 때 이미 나는 청소년기에 가까워 그런 것일 수도 있겠으나 당시 난 유명세에 비해 해당 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를 즐겼기에 때문에 뭐라도 배울 것이 있을까 꾸준히 시청하는 편이긴 했지만 그의 wet-on-wet 기법은 뭔가 '진짜'라기보다는 일종의 인공품이나 모사품을 양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영상 내내 액션도 없고, 말하는 목소리도 낮고, 그려지는 그림도 매번 비슷하고... 한마디로 밋밋했다. 하지만 얼마 전 핸드폰 유튜브 앱에서 (아, 나는 얼마나 파편화된 인간인가) 밥 로스 아저씨의 영상 편집 내용을 보며 새삼 놀랐다.


*영상 참고 - https://youtu.be/Lx5wb33PkqQ


관련 영상을 하나둘 찾아보니 문득 과거의 기억들이 오버랩되며 이 프로그램의 진정한 재미를 다시금 알게 되었다. 내가 이미 화면 속 밥 로스 아저씨와 비슷한 나이대가 되었기에 좀 더 아저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것일까? 매일 비슷한 그림과 비슷한 톤의 목소리 (실제 밥 로스의 목소리와 더빙한 김세한 성우 간의 위화감이 전혀 없다는 것에도 무척 놀랐다), 그 '매일 똑같음'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위대한 행위인지 이제 나는 안다. 스스로 꽤나 평정심을 유지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아내나 나나 아이를 키우면서 감정 기복이 커진다.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하더라도 문득 아이들에게 화를 내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지칠 때는 숨길 수 없이 얼굴과 표정으로 그 예민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 ‘한결같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반복적인 훈련과 연습이 필요한 행위인지, 아마 밥 로스 아저씨는 프로그램을 통해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티브이를 본적이 거의 없다. 원래 별로 좋아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아이들이 깨어있을 때는 온전히 육아에, 아이들이 잠들면 소리가 날까 조심스러워 티브이를 켜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문득 티브이를 보고 있는 아이들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 함께 밥로스 아저씨의 목소리를 따라 아주 천천히 그림이 완성되는 모습을 아무 생각 없이 시청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때요? 참 쉽죠?”


쉽지 않은 인생에 밥 로스 아저씨는 어른아이인 내게 주문한다. 쉬운 인생은 없지만 행복한 사고를 받아들이며 다가올 좋은 시간을 기다리라고. 그것이 한결같음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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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수'의 다음 이야기는 7월 18일에 공유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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