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작가 온수와 교육단체에서 일하고 있는 물꿈이 함께하는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입니다.
'엄마'와 '아빠'라는 서로 다른 역할을 맡고 있는 친구가 만나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글과 그림으로 나눕니다. 멀고 깊은 이야기도, 가깝고 가벼운 이야기도 담습니다.
[너를 통해 나를] 프로젝트는 매월 첫째 주, 셋째 주 토요일에 공유됩니다.
“오리가 꽈-악.”
가만히 있다가도 이 말만 하면 우리는 깔깔 웃는다. 오월의 첫날, 머리 위로 오리가 시원히 날아오르던 개울가로 함께 돌아간다.
유채꽃이 해사하게 핀 2020년 5월 1일, 우리는 집 앞 개울가로 산책을 나섰다. 나는 일 년 중 오월을 가장 좋아한다. 봄과 여름 사이, 화사한 꽃잎이 떨어진 자리에 돋는 연둣빛 신록이 햇살에 반짝이는 모습은 벚꽃 축제만큼이나 아름답다. 풀꽃도 종류별로 모두 피어있다. 풀잎이 계절을 만끽하듯 힘 있게 뻗은 모습이라던가 꽃들의 색색깔 어우러짐, 실바람에 솜털 씨앗이 부드럽게 떠다니는 모습을보는 것이 대단히 좋다.
개울을 향해 걸으며 발아래 있는풀꽃의 이름을 아는 만큼 아이에게 말해주었다. 봄까치꽃, 별꽃, 토끼풀, 민들레, 냉이꽃, 꽃다지, 애기똥풀... 아이를 가지기 전부터 풀꽃을 좋아해서 천천히 외워 온 이름을 지금 곁에 있는 아이에게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하게 느껴졌다. 사실 아이가 듣고있는지, 순간순간 다르고 새로운 곳에 시선을 두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냥 이렇게 아이의 옆모습, 뒷모습을 보면서 엄마 라디오처럼 조근조근 떠들며 걷는다. 버드나무 가지가 흐드러진 아래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커다란 고래 한 마리가 손 흔들며 인사하는 상상을 마음속에 그림으로그려보았다. 어느새 오리가 자주 다니는 개울가 징검다리에 도착했다. 아이는 훌쩍 뛰어 다리 쪽으로 내려갔다 올라오더니 풀을 마구 뜯기 시작했다. 당황하는 나를 뒤로 하고 다시 다리 아래로 휙 내려가 돌 틈 사이물살이 빠르게 휘돌아 나가는 곳에 뜯은 풀을 촥 하고 뿌렸다. 아이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털썩 엎드려 풀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했다.
아, 뽑힌 풀과 꽃의 모습은 어른인 내가 보기에 미안하고 처참했지만, 쫓아내려 가 아이의 눈을 빌려서 보니 이리저리 떠내려가는 풀 뭉치가 신기하기도 하고 웃음이 나기도 했다. 아이는 놀이가 재미있어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이미 말라 떨어져 있는 풀을 대신 가져다주어도 부족했다. 풀들이 성실하게 피워낸 꽃과 잎들이 아이의 거친 손으로 툭툭 뽑히는데 어찌할 바 몰랐다. 다른 부모들은 이럴 때 무어라 말해줄까?
내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나 역시 풀을 뜯고 꽃을 꺾고, 팔찌를 만들고 왕관도 만들고 풀 씨름도 하고, 개미도 참 많이 괴롭혔었다. 문득 숙연해진다. 아이가 하는 경험을 어른이 모두 막아설 수는 없지만, 또 마구 뽑히고 망가지는 풀밭을 보며 가만히 있을 수만 없는 것 아닌가.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떠오르는 말을 일단 건넸다. “풀을 너무 다 뽑으면 나비가 꽃을 찾는데 꽃이 없어서 슬플 거야. 무당벌레도 갈 곳이 없어져서 당황해할 걸. 풀도 막 뽑히면 아프지 않을까? 아프지 않게 조금만 뽑아, 마구마구 뽑지는 말고...” 다행히 아이의 거친 손길은 조금 느려지고 섬세해졌다. ‘지구 할아버지도 어린아이가 머리칼 조금 뽑는 것 정도는 귀엽게 봐주지 않으려나. 내가 너무 예민한가.’ 이렇게 나는 많은 생각에 휩싸였지만 아이는 그저 명랑하기만 하다. “어? 오리가 온다!”
개울 저 편에서 오리 한 마리가 V모양으로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오리는 망설임 없이 주욱 헤엄쳐 왔다. 한참을 부산히 놀다가 다가오는 오리를 가만히 지켜 서 보고 있자니 갑자기 찾아온 고요가 포근하고 간지러웠다. 오리는 우리가 있는 곳까지 오자 왔다 갔다 눈치를 보았다. 다리를 건너가고 싶은데 우리가 신경 쓰이는 것 같았다. 비켜주어야 하나 하고 우물쭈물하는 순간, 오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우리 머리 위로 높게 휘익 날아올라 다리 건너편으로 스윽 미끄러지듯 멋지게 착지했다. 수풀에 있던 물고기 떼도 깜짝 놀라 움틀거리며 물방울을 튀겨댔다. 오리는 그런 자신이 무척 자랑스럽다는 듯 당당한 목소리로 “꽈—악” 하고 긴 울음소리를 냈다. 우리는 “우와 아아!” 하면서 날아오른 오리의 모습을 보다가 오리의 자신만만한 “꽈-악” 소리에 빵 터져서 웃었다. 둘이 같이 “꽈-악, 꽈-악” 소리를 다시 흉내 내 보면서 한참을 키득거렸다. 아이는 마냥 웃고, 나는 이 순간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아 웃다가도 애틋했다.
‘우리는 함께 머리 위로 오리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지.’ 머리에 떠오르는 문장을 마음에 꼭꼭 눌러 적었다.
아이는 다시 개울에 돌을 퐁당퐁당 던지고 동그란 파장이 이는 것을 보면서 놀았다. 땀에 젖은 아이를 보니 걱정이 되기도 하고 이만하면 잘 놀았지 싶어 “이제 갈까?” 했더니 아이는 “아니요, 더 놀래요.” 했다. 그래 조금만 더 기다려줘야지 하는데 어디선가 비둘기 두 마리가 다가와 아이와 술래잡기하듯 놀았다. 멀리 비켜서 지켜보니 그 모습이 그렇게 해맑을 수가 없다.
조금 뒤 다시 ‘이제 다 놀았어? 갈까?’ 했더니 이번엔 아이가 ‘네, 좋아요’ 했다. 아쉬워 우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근처 가게에서 음료수랑 아이스크림을 사 먹어야지 하며 계단을 올랐다. 파라솔 그늘 아래에서 같이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또 얼마나 좋을까. 길가로 천천히 걸으니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아이가 말했다.
“우리가 놀아서 바람이 우리를 식혀주네. 참 고맙네.”
“그러네, 바람이 우리를 식혀주네. 참 고맙네.” 나도 대답했다.
“엄마, 오월 좋아하죠?” “와, 어떻게 알았어? 예전에 엄마가 말했던 것 기억해?”
“왜요? 감동받아서 눈물이 나요? 기억해줄게요. 나도 오월이 제일 좋아요.”
아이코, 나에게 이런 날이 있어도 되는 걸까. 마치 오늘 하루는 근심 없이 행복하라고 주어진 선물 같았다. 내 손에 쏘옥 파고 들어오는 아이의 여린 손이 사랑스럽고소중해 꼭 잡았다.
‘나는 아름답지 않아도, 그래도 거짓 없이 아름다운 것은 너와의 날들이겠다.’하는 문장이 마음에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