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에게 성을 쉬쉬하면

박선희 <베이비박스, 2018>

by Skyblue

1. 나는 도대체 왜 태어났나요?


아는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야. 신학대학원 시절 소년원에 있는 아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하셨대. 소년원은 꽤 심각한 죄를 저지른 아이들이 가는 곳인데 눈빛부터가 살벌해서 처음에는 눈도 제대로 못 맞주쳤다고 하더라. 살얼음 위를 걷는 듯한 아슬아슬한 시기를 어떻게 넘기다 보니 나중에는 아이들이 목사님께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자신들의 속 이야기를 하나 둘 꺼내기 시작했대.


어느 날, 말씀 공부를 하면서 한 아이가 이런 질문을 했대. 자기는 미혼모의 자식이라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엄마도 원해서 낳은 게 아닌데 자신은 도대체 왜 태어난 것이냐고.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이 이루어낸 결실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십 대 초반 젊디 젊은 목사님은 순간 말문이 막히고 말았어. 그 순간 신께서 지혜를 주셨는지 이런 말을 하셨다고 해.


"너가 얼마나 세상에 필요한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해서라도 태어나게 하셨겠니!"


아이는 목사님의 말에 크게 웃었대. 나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 그 아이의 웃음이 진짜 웃음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어. 아마 목사님이 해 준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았겠지. 어떻게서든 존재의 이유를 밝혀주고자 했던 목사님의 마음에 보답으로 웃었을 수도 있고, 동화 같은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허무함에 헛웃음이 나왔을 수도.



2. <베이비 박스> _ 나의 의미를 찾아

리사는 갓난아기일 때 미국으로 입양을 간 소녀야. 어느 날 자신을 아껴주던 양아버지가 죽자, 양어머니는 입양 서류 한 장을 건네며 떠나라고 했어. 리사 나이 18세, 파양을 당하고 만 거야. 리사는 겉모습이 미국인과 달라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끊이질 않았지만, 자신이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털끝만큼도 의심하지 않았어. 지금까지도 그래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평범한 미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리가 굳게 믿었던 거지. 하지만 리사는 파양 이후 큰 혼란에 휩싸이게 돼. 그래서 애써 부인하며 살아온 입양아로 태어난 자신과 제대로 마주하고자 한국에 가기로 결심해.


리사는 한국에 있는 동안 '진'이라는 친구네 집에 머물며 지내게 돼. '진'은 리사가 미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낸 친구야. 진네 집에 머물면서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느끼며 자신에게 없는 것이 당연하기만 했던 '누군가'의 존재가 절실해지지. 진의 도움으로 입양을 주선했던 센터로 가서 리사의 엄마에게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지만, 엄마의 주소지로 알고 있는 곳에 엄마는 살지 않았어. 리사는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어. 도대체 자신을 왜 낳았는지, 낳자마자 버릴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인지, 엄마라는 당신에게 자신은 어떠한 존재였는지 그 어떤 말 도 안 되는 변명이라도 좋으니 들어야만 했으니까.


수소문 끝에 간신히 연락이 닿아 엄마를 만나게 된 리사는 생각지도 못한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돼. 그동안 생모라고 알고 있던 사람은 진짜 엄마가 아니었던 거야. 리사의 친엄마는 18세에 생각지도 못한 임신을 했대. 당시 고등학생이었으니 아이를 낳아도 기를 수 있는 처지가 못 되었을 거야. 엄마의 이모가 당시 처지를 딱하게 여겨 아기를 키워주겠다고 하고 이모의 아이로 호적에 올렸대. 하지만 생활고를 겪기 시작하면서 이모도 아이를 더 맡아 키울 수 있는 형편이 되지 못하자 리사를 해외로 입양하기로 결심해. 여기서 힘들게 사느니 좋은 나라 가서 넉넉하게 살면 더 좋지 않겠나 생각을 했나 보더라고. 그렇게 입양 센터에 기록된 리사의 한국 이름은 윤미지. 엄마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연락을 끊었다던 아버지의 성 '윤'에 아름답게 지혜롭게 자라라는 엄마의 바람을 담은 이름 '미지'. 미지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 가서 '리사'가 되어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채 살아온 거야.


3. 누구의 탓으로 돌려야 하나


리사를 불행하게 만든 원인은 무엇일까? 해외로 입양 보냈던 엄마의 이모? 낳고서도 책임지지 못했던 어머니? 무작정 회피했던 아버지? 어느 것 하나로 단정 짓기 어렵지만 어디든 책임을 돌리려 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상황을 알 것도 같아서 마음이 먹먹할 뿐이야.


해외 입양을 선택한 이모의 변명

어린 나이에 아기 엄마가 되어버린 조카를 위해 자신의 호적에 조카의 아이를 올리겠다고 한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아. 이혼 경력이 있는 30대라서 아이가 있어도 오해를 살 만한 일은 아니라 선뜻 엄마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아이를 기른다는 것은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지. 당시 이모는 이혼 후 그렇다 할 직장에 다니며 돈을 벌고 있지는 않았대. 할머니가 간간히 보내 주는 돈으로 분유나 기저귀 값을 충당하긴 했지만 그것 만으로는 어림도 없었지. 이 생활이 더 길어졌다간 아이도 자신도 피폐해지게 될 것을 직감한 이모는 아이를 해외 입양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대.


소식이 끊어진 아빠의 변명

리사의 아빠는 엄마가 좋아했던 이웃집 청년이었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으로만 그쳤으면 좋았을 것을 그만 선을 넘어서버린 것이지. 자세한 내용까지는 소설에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 청년이 엄마가 원치 않았던 선을 넘어서는 일까지 저질러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결국 엄마는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되었고, 뒤늦게 그 사실을 청년에게 알렸지만 군에 입대한 후부터 연락이 끊겼고, 제대 후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멀리 이사를 갔나 봐. 솔직히 책임지지 못한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이 비난을 받을 일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 청년에게 아빠의 역할을 책임지라고 요구한들 제대로 된 아빠 역할을 할 것 같지도 않아. 오히려 사는 내내 리사를 더욱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들었을지도 몰라.


누구보다 리사에게 미안했던 엄마의 변명

고등학교 2학년, 아기 엄마가 되어버린 엄마. 할머니는 현실적으로 생각했지. 태어난 아기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지만 자신의 딸의 일생에 발목을 잡고 힘들게 할 것을 알았거든. 할머니는 아기를 이불에 둘둘 말아 라면 박스에 넣고 보육 시설 앞에 두고 왔대. 엄마는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밥도 못 먹고 학교도 못 가고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했나 봐. 그러다가 모든 정황을 알게 된 이모가 보육 시설에 가서 아기를 찾아왔던 것이고 그 이후 이야기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야.


4. 10대의 성(性), 그리고 10대 미혼모 이야기


리사의 엄마는 원치 않는 유사 강간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아. 제대로 된 강간 범죄라면 그 사실을 입증하고 죄를 저지른 남성을 처벌할 수 있으며 혹여 임신을 했다 할지라도 낙태를 할 수 있었을 텐데, 이 경우에는 서로의 오해가 빚어낸 결과이다 보니 어떻게 할 도리 없이 만삭이 될 때까지 시간이 흘러버린 거야. 원하지 않는 임신이라고 해서 낙태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2020년에 제도가 바뀌긴 했지만, 그 전에는 낙태를 하기 위해서는 위의 다섯 가지 조항에 충족해야지만 가능했어. 물론 불법으로 낙태를 해 주는 곳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엄마가 임신한 사실을 어떻게 해야 할지 조마조마하며 비밀로 감추는 사이에 낙태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간마저 지나버렸던 게 아닐까 싶어.


2019년 통계에 따르면 10대 미혼모의 수는 268명. 같은 연령대 여성 인구수 240만 명 정도 되니까 그렇게 많은 수는 아니지만,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2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중고등학생 시절에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바람에, 학교에 제대로 다니지 못하게 되고 정상적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말이니까. 10대이다 보니 아이를 직접 기르겠다고 선택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 리사와 같이 보육 센터에 맡겨져 국내와 해외로 입양 가는 사례가 대다수이지 않을까.



조금 벗어나는 이야기가 될 수 있지만, 10대는 더 이상 성(性)에서 소외된 마이너리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10대의 성경험에 대한 설문 조사는 늘 꾸준히 이루어지지만 제대로 된 실태조사가 어려워. 누가 10대 시기의 성경험 유무를 솔직하게 이야기하겠어. 진정 사랑을 하고 서로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행위든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겠지만 어디에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유사 강간이든지, 어떤 방향에서든지 10대는 성으로부터 노출되어 있지. 그럼에도 10대 아이들에게 얼마나 성에 대해 가르치고 그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노력하는지는 의문이야.


그저 10대에는 절대 있을 일이 아니고, 있어서는 안 될 일이라 치부하고 있기에 학교에서든 가정에서든 10대 아이들과 성에 대해 나누는 일이 소극적인 것 같아.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무지하거나 혹은 잘못된 방법으로 음지에서 호기심을 충족하려 들 수밖에 없지. 그러다 어쩌다 사건이러도 터지게 되면 그 일은 그 아이 한 사람의 책임감 없고 부주의한 행동으로 몰아가는 거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로 규정짓는 거지.


절대 그렇지 않아. 10대들의 성과 관련된 문제가 불거지는 것은 결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의 문제야. 성에 대해 여전히 폐쇄적이고 수동적인 인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해 계속해서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봐야 해.


다시 리사의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 리사는 한국에서 버림받고 미국에서조차 거부당한 비참한 처지를 비관했어. 다른 평범한 아이들처럼 아빠 엄마가 사랑으로 만난 가정의 아이가 아닌 것이 속상했고 억울했을 거야. 하지만 리사는 자신의 아픔에만 골몰하는 아이가 아니었어. 어린 나이에 갑작스럽게 엄마가 되어버렸고 무책임하게 아이를 먼 곳으로 떠나보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평생을 살았을 엄마를 충분히 이해할 줄 알았어.


그리고 왜 태어났는지는 앞으로 살아가며 증명하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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