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 <헬조선 원정대_을밀대 체공녀 사건의 재구성, 2020>
1. 역사, 무한대의 퍼즐 맞추기
역사는 퍼즐 맞추기와 같아.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 조각들을 모으고 모아서 순서를 부여하고 인과 관계를 만드는 거야. 그렇게 끼워 맞추다보면 그 안에서 어떻게든 '의미'라는 것이 도출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미래를 비추어보는 거울이 되곤 하지.
문제는 역사에는 애초에 있어야만 하는 '원본 그림'이라는 게 없다는 거야. 무엇이 실제 역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어. 심지어 그 당시를 살아가는 사람이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온다고 할지라도 사건의 전말을 전부 아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역사를 배울 때마다 반드시 생각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거야. 누군가에게 선택되어 의미가 부여된 '역사' 뒷면에는 선택받지 못한 무수히 많은 조각들이 존재한다는 것, 더 나아가 처음부터 조각으로조차 남겨지지 못한 셀 수 없이 많은 일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해.
그렇다면 앞으로 100년, 아니 2,300년 후에 지금 이 시대를 기록한다면 어떠한 역사로 기록될까?
고조선 - 삼국시대 - 남북국시대 - 고려 - 조선 - 일제강점기 - 대한민국 - 헬조선?
2. 헬조선 원정대 _ 헬조선에 사는 지붕 위의 여자를 찾아서
23세기, 환경오염과 핵전쟁으로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인류는 프록시마b 행성으로 이동하여 새로운 인류세를 시작하게 돼. 행성 이주를 시도하면서 너무 급한 나머지 지구의 역사 데이터를 완전히 옮겨오지 못했고, 있던 데이터마저도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증발하고 말지.
행성에서는 <역사 복원 위원회>를 만들고, 지구 역사를 복원하여 프록시마b 행성에서 살아가는 신인류가 나아갈 미래 비전으로 삼고자 해. 이를 위해 가까스로 복원한 자료를 바탕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일주일간 그 시대로 가서 관찰하고 물건을 가지고 돌아와야 하지. 마린은 위원회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헬조선'이라 불리던 시기에 찍힌 사진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찾아가는 임무를 맡게 돼.
1931년 평양 을밀대로 날아간 마린은 그곳에서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을 위해 지붕 위로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인 '강주룡'이라는 여성을 만나게 돼. 마린은 자신이 살고 있는 미래에는 너무도 당연한 것들이 이 시대에 아무렇지 않게 짓밟히는 현실을 마주하면서 크게 혼란스러워하지. 강주룡의 농성으로 많은 여공들의 권리는 보장되었으나, 정작 자신의 권리만큼은 되찾을 수 없었던 것 같아. 그녀는 빈민굴에서 숨을 헐떡이며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어. 마린은 강주룡의 기구한 사연을 알게 되고,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생각을 해. 그래서 규칙을 위반해서라도 강주룡을 미래로 데려오려고 하지.
3. '헬조선'과 '을밀대 체공녀'
헬조선이라는 말은 2012년 즈음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수 없는 환경의 현실을 비꼬면서 인터넷 공간에서 유행하게 된 말이라고 해. 그리고 체공녀 강주룡이 여공들의 권리 투쟁을 위해 을밀대 지붕으로 올라간 것은 1930년의 일이지. 시간차가 꽤 벌어져 있음에도 헬조선과 강주룡의 연결이 그리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강주룡의 삶 또한 나아질 희망 없는 비참한 모습이었기 때문일 거야.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과 더불어 헬조선이라는 말은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가 얼마나 힘들고 혹독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하고 연애도 취업도 포기하고 하도 포기하는 게 많아서 삼포, 사포를 넘어 N포 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했다지 아마? 나 또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공감하는 바가 크고, 오죽했으면 이런 자조적인 말로 스스로를 비아냥거릴 수밖에 없을까라는 생각에 굉장히 서글프기까지 해.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5000년 역사를 통틀어 '헬'이 아니었던 적이 있나 몰라. 어떤 시대와 공간에도 억눌려 있고 힘든 이들은 늘 존재했을 테니까. 차마 기록으로 남지 못해 어떠한 비명을 지르고 사라져갔는지 알 수 없지만, 없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어떤 시대를 가도 지옥과도 같은 삶을 살아가야 했던 제2, 제3의 강주룡이 있었을 거야.
4. 역사는 과거에 있지 않다
역사를 배우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사람이 있어. 모든 역사적 사실의 기록은 이 한 마디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 없는 대화이다. (E.H.Carr) _ <역사란 무엇인가> 중에서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역사는 원본 그림 없는 퍼즐 맞추기와 같아. 맞추어야 할 그림이 없는데 어떻게 퍼즐을 맞추나 싶지? 바로 현재의 누군가가 맞추어야 할 그림을 정하고, 과거를 뒤져가며 존재하는 퍼즐 조각을 하나 둘 찾아가는 것이지. 마치 마린이 '헬조선'이라는 단어와 '체공녀 강주룡의 사진'을 가지고 역사를 복원하는 여행을 떠났던 것처럼 모든 역사는 무엇인가 기록해야만 하는 필요로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어.
체공녀를 역사로 부활시킨 것은 바로 현재에 있어. '여성'으로서 제대로 된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바꾸어보고자 하는 이들의 생각이 하나의 그림이 되었고, 그림에 걸맞은 조각들을 찾고 찾아 강주룡에 다다르게 된 것이지.
더 많은 대화를 해야만 해. 지금껏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대화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다시 만들고 복원해야 할 역사가 무엇일지 고민해보자. 그저 시험기간에 달달 외우는 죽어있는 역사로부터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게 할 가슴 뛰는 그 한 조각의 퍼즐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