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 계기
유난히 분주했던 연말연초, 갑자기 소개팅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혼이 빠지게 바빠 단번에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문득 이성을 만난 게 언제인지 가물가물했다. 나이는 점점 먹어가는데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올까. 이럴 땐 역시 고민보다 GO, 까짓 거 해보는 거다.
의욕 넘치게 연락은 했다만 고민이 있었다. 아무리 편한 마음으로 나간다고 해도 집 앞 편의점 갈 때처럼 입고 갈 수는 없는 일. 그렇다고 소개팅 한 번 하는데 옷까지 장만하기에는 거추장스러웠다. 그럴듯하게만 입으면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옷장을 열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옷장 속 컬렉션을 따랐다간 소개팅을 나가는 건지 동네 마실을 나가는 건지 알 수 없는 비루한 모습이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결국 소개팅 전날 퇴근길에 부랴부랴 백화점으로 돌진, 폐점 준비를 하고 있는 직원을 붙잡고 베이지색 원피스 하나를 간신히 손에 넣었다.
소개팅남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평범함과 편함의 중간 정도랄까. 상대방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 저런 스타일이면 굳이 겉모습에 큰 의미를 두지 않겠거니 했던 것이다. 첫날 만남은 그렇게 물 흐르듯 지나갔다. 이후 서너 번을 더 만나고,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며 점점 열릴 것만 같은 그 시점에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듣게 되었다.
"너가 참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아서
고민이 많았어.
그런데 여자로는 보이지 않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은 아쉽긴 했지만 사람의 마음을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동안 즐거웠다는 말과 함께 '쿨'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이 정도면 그리 나쁘지 않은 소개팅으로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열이 잔뜩 받은 주선자에게 전화가 왔다.
"정말 이것만큼은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원 성질이 나서 말이지. 아니 글쎄 여자처럼 못 꾸민다고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이게 말이 돼?"
주선자는 말했고, 나는 말문이 막혔다.
<지인 1 : 40대 후반 여성>
"신경 쓰지 마. 그런 걸 두고 그냥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는 거야."
<지인 2 : 20대 중반 여성>
"완전 어이없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에요. 지는 얼마나 잘났다고. 차라리 잘 됐네요. 이런 걸로 판단하는 사람이면 엄청 별로였을 거예요. 그 사람."
<지인 3 : 30대 중반 남성>
"너, 그 사람 만날 때 어떻게 입고 나갔는데? 남자는 다 똑같아. 너 실수했던 거 아니고? 그때 했던 일들 다 말해 봐."
주변의 지인들은 각자가 살아온 인생의 무게만큼 나를 위로했다. 신경써준 건 고마웠지만 내 마음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예쁘지 않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모순된 말이 계속 맴돌았다. 아무리 좋은 사람이어도 여성스럽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말인가?
물론,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직구로 날릴 수 없으니 에둘러 한 핑계였겠지만, 어디가 어떻게 여성스럽지 못한 것인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여성스럽게 되는 것인지 아니 도대체 '여자'처럼 '여성스럽게' 다닌다는 게 무얼 말하는 것인지 속이 뒤집힐 정도로 고민하며 괴로워했다.
노력과 근성이라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데, 노력하면 되는 건가? 나이는 먹을 대로 먹고서 이다지도 유치한 말장난에 산산조각 나버린 나는 삼십 대 중반 어느 날, 무턱대고 예뻐져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