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템의 덫

제3장 : 패션

by Skyblue




"야, 나 바지 샀는데 한 번 봐주라. 첫 번째 사진에 나온 바지가 어울려? 아니면 두 번째 바지가 어울려?"


"첫 번째는 엉덩이가 너무 커 보여. 너는 허벅지랑 엉덩이 쪽이 발달한 체형이니까 첫 번째 바지는 입지 마.

두 번째는 그나마 일자 모양이라 낫네."



이걸로 다섯 번째. 내 눈에는 분명 첫 번째 바지가 더 잘 어울려 보였다. 하지만 친구들에게 물어보는 족족 두 번째 바지가 낫다고 입을 모았다. 사람 보는 눈이 다 다르다지만, 나는 달라도 너무 다른가? 아니 이쯤 되면 내 눈은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건가?


언제부터 이렇게 패션 문외한으로 살아왔는지 삶의 이력을 더듬어본다. 생각해보니 내 의지를 가지고 옷을 사서 입었던 시작 시점부터가 남들보다 늦었다. 대학에 들어오면서부터였나?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굳이 교복 이외에 신경을 써서 입고 다닐 일이 별로 없었고, 사봤자 명절 즈음에 부모님이 백화점이나 아웃렛에 갈 때 따라가서 적당하게 골라주는 옷을 넙죽 받아 입곤 했다. 그때는 그렇게 입어도 딱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물론 가끔씩 밖에서 친구들을 만날 때면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 친구들의 모습에 기가 죽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사복을 입는 시간보다 교복을 입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길었던 시기라 그런 의기소침함쯤은 한숨 자고 일어나면 사라질 일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자 교복의 그늘에 숨길 수 없었던 적나라한 나의 몸은 어딘가 안식처를 찾아 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처음엔 뭣도 모르고 눈에 보기에 예쁘면 쉽게 사 버렸고, 내 체형에 어울리는지 아닌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입고 다녔다. 그리고 나중에 친구들로부터 지적을 받거나 하면 뒤늦게 깨닫고는 버리고 하는 일을 반복했던 것이다. 지금도 당시 찍었던 사진을 들여다볼 때면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어떻게 입어야 할지 늘 고민은 하지만 실천하려 들 때마다 실패하는 것 같아서 언제부턴가 반쯤 포기하고 살았다. 그저 일상에 방해되지 않도록 편하고 활동성이 좋은 옷들만 즐겨 입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후드티, 맨투맨, 청바지가 주를 이루었고, 가방은 백팩, 신발은 운동화. 옷이 이러니 기타 장신구에 돈을 쓸 리도 없고, 목걸이나 반지 귀걸이는 선물 받은 거 외에 직접 내 돈 주고 산 것은 손에 꼽았다.


물론 여자 흉내를 내고 싶어질 때가 2년에 한 번씩 찾아오곤 했다. 그러면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치마를 사거나, 구두를 사거나, 그동안 해 보지 않았던 패션 영역에 과감히 한두 번씩은 도전했다. 그리고 도전의 끝엔 언제나 역시 안 되는 부류의 인간이구나 하는 각성과 함께 다시 그 전과 같이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충격적인 소개팅 후폭풍에 휩쓸려 무작정 예뻐지겠다고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이어트와 함께 옷차림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에는 분명 내가 하고 다녔던 차림새에서 풍겨 나는 거친 모습이 한 몫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옷장을 열어젖히고 가지고 있던 옷들을 여기저기 헤쳐보기 시작했다. 짐작은 했다만 역시나 가관이었다. 우선 티셔츠와 청바지는 아무리 봐도 똑같이 생긴 것들이 여러 벌 섞여 있었고, 2년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때에 객기를 부리며 사 두었던 말도 안 되는 이상한 옷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우선은 버리기 시작했다. 거의 입지 않고 버리는 옷들이 대부분이라서 처음에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새 옷을 사더라도 옷장이 비어있지 않으면 넣을 곳도 없겠다 싶어 눈 딱 감고 옷장에 있는 옷 절반 이상을 갖다 버렸다.


비우니 또 채우고 싶은 마음이 울컥 솟아올랐다. 하지만 무슨 옷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옷을 즐겨 사던 사람이 아니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감이 안 왔다. 그때부터 패션 유튜버들의 개인 방송을 열심히 구독했다. 어떻게 하면 옷을 잘 입을 수 있나, 무슨 아이템을 사야 유용하게 잘 입나 이런 동영상들과 다양한 패션 아이템들을 소개하는 영상을 부지런히 챙겨보았다. 또 뭐 하나 시작하면 열성을 다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필기하고 심지어 복습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패션 유튜버들은 하나 같이 기본템을 강조했다. 어떤 옷을 가지고 있어도 기본템을 가지고 있으면 여기저기에 같이 활용해서 입기 좋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흰색 블라우스, 검은색 슬랙스, 흰색 티셔츠, 검은색 티셔츠, 흰색 끈 나시, 검정 블레이저 ... 이런 기본적인 아이템들을 하나둘씩 적어 두고 인터넷과 백화점을 물색해가며 쟁여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본템을 바탕으로 옷을 입으려고 하는데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점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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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나는 기본템으로 옷을 갖추어 입은 사람이 아니어서 몰랐는데 기본템은 정말 기본템일 뿐, 기본템을 깔고 그 위에 덧칠할 다른 아이템을 또 사야만 했던 것이다. 기본템의 덫에 제대로 걸려든 셈이다. 그리고 기본템도 다 똑같은 게 아니다보니 정말 유용하게 쓰이는 기본템 디자인이 있는 반면 약간 다르고 사이즈가 뒤틀어져 전혀 기본템스럽게 입을 수가 없는 기본템들도 있었다. 애초에 옷을 보는 안목이 부족한 내가 기본템을 산다고 뛰어들었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기본템에 덫에 걸려 장작 1년 동안 열심히 옷을 사 날랐다. 분명 사는 옷은 늘어나는데 옷을 잘 입고 있다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입고 있는 모습이 제대로 된 모습일지 의심이 들었고 내 눈을 도대체가 믿을 수가 없어서 옷을 살 때마다 사진을 찍어서 친구들에게 뿌리고 어느 것이 나은지 묻곤 했다. 친구들끼리 비슷하게 반응하는 것도 있었고, 전혀 다르게 반응하는 것도 있었다.


어느새부턴가 이런 일련의 과정에 지쳐가기 시작했다. 돈은 돈대로 들면서 왜 더 이상해지기만 하는 걸까? 이런 고민을 친구에게 털어놓으니 그렇게 3년 이상은 사고 버리고를 반복해야 자기 스타일이 나올 거라고 여기서 포기하지 말라고 했다. 정말 그럴까? 이렇게 3년을 돌고 돌면 나는 어느 정도 옷 좀 입는 센스 있는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옷을 사고 옷의 가짓수가 늘어날 수록 더 사야만 하는 항목만 늘어날 뿐 만족함은 전혀 채워지지 않았다. 친구는 3년을 기약하라고 했지만 나는 더 이상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냥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어 졌다. 도대체 몸은 하나인데 왜 그렇게 옷은 많이 필요한 거냐고.


그러던 어느 날 구독하던 패션 유튜버가 라이브 방송을 연다는 알림이 떴다. 마침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때라 구경할 겸 들어갔다. 선술집에 앉아 술잔을 따라 마시며 패션 고민 상담을 듣고 나누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나도 질새라 대뜸 질문을 올렸다.


"옷을 잘 입고 싶은데, 계속 실패만 하는 것 같아요. 기본템이라는 것도 사실 의미가 있나 싶고요."


유튜버는 내 질문을 읽더니, 잠시 머뭇거리다 이런 말을 했다.


"안녕하세요, 라이브에서는 처음 뵙는 분이네요. 옷을 살 때는 우선 자신이 어떠한 이미지인지를 알아야 해요. 그 이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옷을 산다한들 지금과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거예요. 주변에 친한 친구들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자신이 어떤 이미지인지, 여성스러운지 활동적인지 혹은 어떤 스타일로 입었을 때 가장 잘 어울렸는지."



며칠 후 서너 명의 친구들이 모여 오래간만에 식사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마침 유튜버가 했던 말이 생각 나 밥 먹다 말고 대뜸 물었다.


"너희들이 보기에 나는 어떤 이미지 같아? 내가 어떤 스타일의 옷을 입었을 때 좀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해?"


주제도 없고, 맥락도 상실한 질문에 친구들은 포크를 내려놓고 사뭇 진지하게 대답했다.


"너 요새 무슨 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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