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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한

“비워도 차고, 채우면 비워져서”


마치 술잔처럼 말이다.


세혁은 재영이 떠나고 난 자리를 온통 술로 채웠다. 마음에 구멍이라도 난 듯, 채우고 채워도 비워진 상태였다. 너로 가득 찰 때는 몰랐는데, 너에게 취해있을 때는 몰랐는데 나에게서 너를 떼고 나니 남는 것이 없었다.

세혁은 이미 차단되어버려진 전화를 올려 또 번호를 누른다. 010.0000.0000. 그렇게 누르고 나면 그가 듣고 싶어하는 재영의 목소리가 아닌, 차단음이 들리지만, 이미 옛 세월 속의 재영과 지금의 취한 세혁은 이를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비워진 잔을 바라보는 세혁, 그 잔에 재권이 술을따른다. 붉은색 모자를 벗어버린 초록빛깔의 투명한, 탄산은 아니지만 공기방울이 바닥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수분기 가득한 음료.


“보고싶다.” / “보고싶다.”

“그만좀 해라.”


자신의 앞에서 술잔을 놓지 않는 재영을 바라보며 정은은 짜증이 난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런 정은을 바라보는 재영의 눈에는 이미 초점이란 게 없는 채였다.


“보고싶은 걸 보고 싶다고 하는 게 죄냐?”


재영이 손을 바닥을 정은에게 보인채 한 번 갈고리처럼 휘두르더니 곧장 술잔으로 손을 가져간다. 그런 재영이 잡으려던 술잔을 가로채는 정은이었다.


“그만 마셔, 이미 취했다.”

“응. 나 취했었지. 지금도 취한 거고. 더 취할거야”

“좀. 정신 좀 차려 인마”

“너 나랑 같은 팀 이잖아!!”

“같은 팀 같은 소리하네 미친년이”


술잔을 되칮으려는 재영과 이를 무마시키려는 정은이 서로 얽히고 있는 사이에 달빛은 차갑게 내려앉고 있었다. 내려앉은 달빛 사이를 뚫고, 두 사람에게 같은 시간에 적힌 다른 그리움이 엄습해 들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었어. 한 마디면 됐다고!”


술은 이미 칠해져 있는 마음의 색을 드러나게 만든다. 술에 취한 게 아니라, 칠해진 마음이 들어나게 하는 게 술이었다.


서로 다른 사람에게, 서로의 술주정을 부리고 있는 재영과 세혁이었다.


“데려와 시;발! 데여 오! 아룩 시띠발!”

“야!! 내가 뭘 그렇게 잘 못 했냐! 연락 그거 하나 조금 안된 거 가지고!! 어 내가 하루동안 쭉 안된것도 아니고 단 몇시간 그거 하나가지고! 어어어어!!”

“야 최재영!!”

“야 박세혁!!”

“너 이 개씽니넛야!”

“너 이... 나쁜노마”


하지만 그렇게 술로 드러난 마음은, 산산조각이 난 채로 부서지고 만다. 미술관의 예술작품이 만은 관객들에게 노출되듯이, 그 노출이 길어질수록 조금씩 원래의 색을 잃듯이.


“딱, 한 마디만.. 더하자.. 한마디만..”

“그 때 내 이름 한마디만.. 해주지 그랬냐”

“최. 재영. 재영아.”

“나쁜노망”

“행복해라.”

“나쁜시.. 끼”


술에 취한 채.

과거의 그리움의 취 한 채.


그렇게 두사람의 그리움은 오래된 그림의 색이 벗겨지는 것처럼.

서로의 그리움을.


술로 채워갔다.

술로, 벗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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