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

23주차 키워드 글쓰기 [무명]

by 라한

기억은 불꽃과 같다. 마음을 재료로 시간을 불러낸다. 때로는 필요한 온기를 주지만, 때로는 뜨거워서 화상을 입게 만든다.


가장 깊은 어둠은 언제나 새벽을 가까이 둔다. 밤새 뜨거웠던 세혁과 연우는 나체의 그대로 잠들었다. 온몸에서 흘렀던 땀과 특히 마찰이 심했던 부분에서 서로의 체액이 혼돈의 상태로 뒤섞인 채로였다.


연우의 머리카락이 세혁의 입속을 탐닉하는 일은, 이 마찰이 한참 발생해서 핵분열만큼이나 뜨거운 에너지가 발생하는 중에도 일어났던 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의 직접 마찰이 멈춘 후, 차가운 새벽에도 식지 않았다. 두 사람의 연결된 마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침대에서 마치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마음처럼 떨어지지 않은 신체였다. 처음에는 서로를 끌어안은 채, 서로의 입술과 입술이 부딪친 모습이었다. 한쪽의 튀어나와 온 가슴이 다른 한쪽의 그렇지 못한 가슴과 맞닿은 채였다. 코끼리가 올라서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과학으로 만들어진 침대 위에서였다. 그렇기에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온전히 안기 위해 생각보다 가볍지 않은 무게를 온전히 버텨내야만 가능한 자세였다.


첫날은 처음이니까 그렇다 할 수 있지만, 여러 번 반복되면 힘들어질 수도 있는 자세였다. 세혁은 연우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가끔은 팔이 너무 아파 중간에 눈을 떠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지만, 숨소리와 따뜻한 공기를 내뿜는 연우가 앞에 있음을 확인하고, 약간의 공간이 있는 곳으로 연우가 깨지 않게 팔을 옮겨보려다, 무리라는 걸 알게 되면 다시 그대로 잠을 청하는 세혁이었다.


그럴 때마다, 자신을 반하게 만들었던 정갈하게 휘날렸든 머리카락 한 움큼이 자신의 입속에 들어가 있을 때를 발견한다. 처음 머리카락이 입속에 들어왔을 때는 당황했다. 한참 뜨겁게 달아오른 채로, 마치 태고의 부족함을 채워야 하는 두 몸체를 확인했을 때처럼, 자신 쪽이 들어가는 대신, 반대쪽에서 들어온 것이 머리카락인 것만 같았다.


잠결에 발견했을 때는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자신의 입속에 들어온 머리카락을 빼내고는 한다. 연우의 머리카락이 자신의 입에 들어왔을 때 자신도 연우의 사이를 파고든 때면 그때는 신경 쓰지 않는다. 서로를 탐하다 보면 더 많은 머리카락이 어떻게 알고 덮쳐오는 것을 알아서였다. 연우와 세혁의 뒤섞인 체액이 묻은 머리카락은 세혁의 입이든, 그리고 다른 곳이든, 연우의 몸이든 뜨거운 어디든 잘 달라붙었다. 그러다 짝사랑하는 상대의 머리카락 세 결을 불에 태워서 먹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떠올리며, 지금도 이렇게 사랑하는데 만약 자신이 연우의 머리카락을 태워 먹으면 연우는 평생 자신을 떠나지 않을까란 장난스러운 생각을 하는 세혁이었다.


두 사람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서로를 보는 것을 좋아했다. 주로 연우가 먼저 세혁을 도발하면 세혁은 못 이기는 척 연우의 도발에 패배했다.


“나를 잠에서 깨웠으면 책임져야지!”


세혁과 연우는 그런 행복의 시간이 영원에 도전할 수 있는 에너지라고 생각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사랑을 했다.


서로의 몸보다 서로의 마음이 더 좋다던 둘은, 역시나 사랑은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다는 어떤 무명의 철학자의 말처럼 서서히 멀어져갔다.


마음이 멀어져도, 서로의 몸은 서로를 기억했고, 한쪽이 침울해 슬퍼져 우울해지면 그 심연의 슬픔 속에서 건져 올렸다. 자신을 쓰다듬듯 조심스럽게 살피듯 만지는 세혁의 손길을 연우는 잊을 수가 없다. 조심스럽게 부드러운 연분홍빛과 자신의 분홍빛이 만났을 때의 감촉은 하늘이 선물한 최고의 느낌이었다. 간지럽다고 하기에는 황홀하고 황홀하다기에는 어쩐지 실수하여 튀겨진 물방울처럼 촉촉하면서도 아찔한 느낌이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찐득한 분홍의 괴물은 처음에는 사랑의 맛이었는데 이제는 무슨 맛인지 모르겠지만, 없으면 안 될 거 같은 무서움이었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몸을 뒤섞으면서였다. 온갖 구멍으로 서로의 몸을 넣고 빼고 했지만, 두 사람의 마음에는 이제 서로는 없는 상태였다.


몇 번인가 헤어질 위기를 섹스로 극복하더니, 이제는 헤어진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했던 기억을 더듬을 때 보다 격렬하게 서로의 몸을 사랑했다. 서로를 위한 마음보다 더 만족하는 섹스를 지향하게 되면서 이제는 상대의 상태보다 나의 만족이 더 우선시 되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사람에게는 제안하지 못할 자세마저도 세혁과 연우는 눈빛만으로 의사를 교환하고 시도했다.


또 한 번 사랑이 끝나고, 새벽이 오고 있는 깊은 밤이었다.


“이제, 그만하자”


처음 끝을 선언한 것도 아니기에, 늘 있는 일인 줄 알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은 연우. 조금 전까지 뒤엉켰던 침대에 누워있던 세혁이 연우를 뒤에서 안았다. 연우가 뒤돌아 보자 자신의 붉은 입술 사이에 있었던 부드러운 혀를 내밀었다. 연우는 그런 세혁의 공격을 막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한 번, 자신의 입술을 내어준다.


그렇게 서로의 혀가 자신의 집을 떠나 이제는 위치도 외워버릴 상대 속을 휘젓고 다닐 때, 세혁은 연우의 몸속에서 제일 부드러운 가슴을 주무른다. 살짝 긴장한 상태처럼 힘이 들어가 있는 꼭지를 밑에서부터 천천히,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짝 쓰다듬는다. 꼭지를 사이에 두고 검지와 중지를 마치 바닥에 놓고 달리기를 하는 거처럼 자극하면 연우가 신음을 살짝 내뱉는다.


“이래도..?”

“...”


연우는 또 한 번 아무 말 없이 세혁을 쳐다본다. 연우가 끝을 말하면 세혁이 말리고, 세혁이 마지막을 얘기하면 연우가 다시를 말하며, 두 사람의 몸을 나누는 정은 끝없는 줄다리기처럼 계속된다.


하지만 끝내 마지막은 찾아오는 법. 어느 누가 할 것이 어느새, 서로에게 연락이 뜸하다, 이제는 잊힌 세월이 어느덧 십 년이 넘은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발견한 연우의 딸. 그 딸의 머리카락과 십년을 넘게 보관해온 연우의 머리카락을 꺼내 자신의 것과 함께 병원에 제출하고 오는 세혁이었다.


병원을 한 번 돌아보는 세혁, 전화가 울리는데,


“여보, 언제 들어와?”

“아빠!! 언제왕”


영상통화로 걸려온 전화기, 그곳에는 연우와 닮은, 그러나 다른 세혁을 여보라고 칭하는 여자가 있었고, 세혁을 닮은 남자아이가 있었다. 뒤에는 문이 닫히면서 그보다 큰 여자아이가 ‘학교 다녀왔습니다.’ 라고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가 정말 끝을 내야했던 시간, 그러던 시간에 안부조차 묻지 않았던 마지막의 시간으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얼마전 보았던, 연우의 손을 잡고 있던 그 아이가, 진짜 자신의 아이라면. 그러면 그때 왜 자신을 떠났냐고 묻고 싶은 세혁이었다. 자신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냐고.


그럼, 연우는 세혁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니가 사랑할 때를 아니까. 나연이라고 했나? 행복해 보이더라. 내가 널 그렇게 본 게, 니가 날 그렇게 본 게 언제였더라.”


그 말을 들은 세혁은 크게 소리칠 게 뻔했다.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문제잖아!”


그러면 연우는,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겠지.


“착각하지마.”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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