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보리 Aug 01. 2022

파마한 거 아니고 곱슬머리예요

곱슬머리가 시골에서 살아가는 법

ㅅ태생부터 곱슬머리는 아니 였다고 엄마가 말했다.

"애기 때에는 살짝 구불 한 정도였지 이렇게 심한 곱슬머리는 아니었어"라고.


그렇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막 파마를 하고 나온 것 같이 생긴 슈퍼 곱슬머리이다.


엄마의 말에 따르면 다섯 살 즈음에 할머니 댁에 잠깐 떨어져 산 적이 있는데, 그때 할머니가 긴 머리를 매일 감기고 묶기 어려우셨는지 정말 남자아이처럼 커트머리로 잘라 버리셨고, 그 이후부터 자란 머리들이 곱슬머리처럼 올라왔다고 했다.


아무튼, 내가 기억하는 내 머리는 곱슬머리의 기억뿐이다.


여름에 비를 맞으면 앞머리가 파마머리처럼 구불구불하게 말려버렸다. 어른들은 그런 내 머리를 보고 인형머리 같다고 신기 해 하셨지만, 어린 마음에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 이후에도 초등학교 때에는 아침에 엄마가 머리를 묶어 주는 대로, 앞머리가 꼬불꼬불한 채로 다녔는데 문제는 중학교 때부터였다.


'단발머리에 귀밑 3cm'라고 정해진 규정이 있던 시절이었다. 중학교 입학 전 머리를 단발로 잘라봤는데 도저히 단발머리를 하고 다닐 수 없는 상태였다. 조금 심각한 문제였다. 놀림을 받을 게 뻔한 상태였다. 결국 엄마는 학생부에 찾아가 내 머리를 보여주고 머리를 묶고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내 머리를 본 학생부 선생님은 머리를 묶고 뒷 머리를 말아 올려서 소위 말하는 '똥머리'를 하고 다니는 조건으로 허락하셨다.


그래서 중학교 3년 내내 머리를 묶고 다닐 수 있었고, 고등학교는 어깨 정도까지 기를 수 있게 되어 있어서 그때도 3년 내내 머리를 묶고 다녔다. 머리를 풀고 다니지 않아서 좋았지만, 또 그렇지 않은 친구들 사이에서 도드라지는 건 마찬가지였어서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가끔 곤란할 때도 있었다. 잘 모르는 선생님이 왜 머리를 묶고 다니냐고 하면 매번 설명해야 했고, 돌돌 말아놓은 머리를 풀어보라고 한 뒤 머리가 기다며 머리끈을 뺏어가던 선생님도 있었다.


그 사이 '매직 스트레이트'라는 곱슬인에게 혁명 같은 미용 기술이 발달하면서 학교 내 곱슬머리들 사이에서 곱슬머리를 펴 준다는 파마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찰랑거리는 생머리를 하고 온 애들이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매직'이었다. 다들 모여들어 구경하기도 하고, 그 미용실이 어디인지 서로 묻느냐고 난리였다.


그 미용실 이름을 잘 기억했다가, 겨울방학 때 큰 마음을 먹고 엄마에게 돈을 받아 멀리 서울에 있는 여대 앞의 미용실을 찾아갔다.


미용사는 내 머리를 보고 흠칫 놀라는 듯했지만, 자신 만만하게 생머리로 만들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나도 찰랑거리는 생 머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신이 났다. 3시간 정도가 지나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고 드라이기로 말리기 시작했는데, 맙소사! 머리가 하나도 펴지지 않았다. 하나도 펴지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건 생머리라 부를 수 없는 상태였다. 미용사 아저씨도 당황한 것 같았다. 당황한 손으로 머리 이곳저곳을 들춰 보았지만 정말 거의 펴지지 않은 상태였다. 미용사 아저씨는 애써 당황함을 감추면서 다시 해 주겠다고 했고, 그렇게 두 시간 정도가 더 지나서야 생머리 비슷한 형태의 내 머리를 만날 수 있었다. 총 다섯 시간이나 걸려 찰랑거리는 생 머리를 만날 수 있었다. 미용사 아저씨도 나도 지쳤다.


식구들도 생머리를 보고 신기해했다. 물론 나도 신기해서 거울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했다. 그렇지만 독한 파마약을 하루 종일 발라놨던 머리카락은 뚝뚝 끊어져 나갔고, 결국 정수리는 까치머리처럼 됐다. 게다가 찰랑거리던 머리도 집에서 몇 번 감고 났더니 다시 부스스 해졌고,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갈 때쯤에는 생머리의 꿈은 사라지고 다시 예전처럼 '똥머리'로 등교해야 했다.


그래도 미용 기술이 차차 발전 한 덕분에 대학교를 다닐 때에는 간간히 매직을 하거나, 고데기로 스스로 피고 다니거나 했고, 직장을 다니면서부터는 2-3달에 한 번씩 파마를 해 가면서 생머리를 유지했었다.


그렇다고 마냥 편한 일은 아니었다. 매번 시간을 내서 미용실에 가야 했고, 숱이 많고, 워낙 곱슬이 심한 터라 미용실 의자에 앉아 머리가 풀어헤쳐질 때면 마치 발가벗은 것 마냥 창피했다. 곱슬이 아주 심하다며 마치 신기한 물건을 보는 듯 반응했다. 그리고 종종 무례한 미용사들은 숱 많고 곱슬기가 강한 내 머리를 피면서 힘들 다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한번 하는데 20-30만 원씩 돈도 돈대로 많이 들어갔다.


형제가 3명인데 언니도 동생도 이 정도는 아닌데 왜 나만 곱슬이 이렇게 심한지 싶어 짜증이 나기도 했다. 돈도 시간도 많이 잡아먹는 머리였다.


그렇게 살다가 문경에 왔더니 미용실이 마땅한 곳이 없었다. 분명 미용실에서 내 머리를 보면 기함을 하실 테고, 십 수년의 매직 파마 경험상 잘하지 못하면 정수리가 까치 머리가 되어버리는데, 그럴 가능성이 커 보였다.


그렇다고 머리를 하러 멀리 가고 싶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매직했던 게 남아있어서 머리를 해야 할 때는 집에서 대충 피기도 하고, 약을 사서 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마저 점점 번거로워지면서 다시 똥머리로 돌아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보니 구불구불한 머리가 점점 자라나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렇게 머리가 자라는지 내가 봐도 신기했다.


예전에는 바짝 뒤로 묶어서 똥 머리를 했는데, 구불구불한 머리가 썩 나쁘지 않아서 그대로 살려서 묶고 다니기 시작했다. 파마를 했느냐고 종종 묻는 사람들이 있었고, 곱슬이라고 하면 신기해했다. 또 머리가 예쁘다고 해 주는 분들도 계셨다. 나와 잘 어울린다고 했다. 뻔한 칭찬이라도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조금씩 내 머리로 자란 게 문경에 온 시간만큼 쌓여 어깨 밑으로 내려왔고, 머리를 풀면 전체적으로 구불구불한 머리가 되었다. 좋게 말해서 디즈니 캐릭터 ‘모아나’를 닮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나는 해리포터에 나오는 ‘해그리드’ 같다고 이야기한다.


마땅한 미용실이 없어 이렇게 됐지만, 자연스럽게 ‘나’인 채로 살아가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문경에 오게 되면서부터 나를 드러내는 일이 많았다. 내려오기 전까지 학교를 다닐 때에도, 직장을 다닐 때에도, 나를 크게 드러내지 않고 살았었다. 앞으로 나서거나 드러내는 일 없이 조용히 살았는데 문경으로 내려온 순간부터 책방을 하고, 농사를 하게 되면서 여기저기 나를 드러내고 살게 되었다.


그게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기고, 불편하기도 했는데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다. 내 곱슬머리도 마냥 불편한 거라고 생각했는 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니 오히려 편해졌다. 독한 파마약에 찌들어 있던 머리카락도 건강해졌다. 부스스해 보이지만 부드럽고 매끄럽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따라 손으로 쓰다듬으면 리듬감이 느껴져 재미있기도 하다. 이젠 내 곱슬머리가 좀 마음에 든다.



문경에 와서 마흔을 코앞에 두고, ‘나’인 채로 살아가는 법을 조금 배운 것 같다.



그렇지만 방금, 머리를 말리는 중이라 풀어놓은 내 머리를 보고 지나가던 할머님이 입을 떡-하니 벌리고 놀라시며 지나가셨다. 히히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