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사회는 나이가 중요한 조직이 아니다. 급이 중요하다.
29살 6급 주무관: "예산 봤어요?"
나: 예산요?
29살 6급 주무관: "본인이 맡은 사업 예산요!. 돈 부족해요? 괜찮아요? 이거 빨리 얘기해 줘야 돼요!"
나: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29살 6급 주무관: "아직 분석 안 했어요? 지금 해요. 지금 갖고 와봐요."
나: 아직 제대로 못 봤고, 지금은 출장을 나가야 하는데요.
29살 6급 주무관: "언제 하려고요? 예산 부족하면 본인이 공사 책임질 거예요? 지금 갖고 와봐요! 아나 미치겠네. 공사 몇 개 맡았어요? 제일 큰 공사가 얼마짜리예요?! 대답 못해요?? 지금 빨리 엑셀 갖고 와요!!!!
...

나: ((된장).. * 됐다!! 나야말로 미치겠네)
늦게 들어와서 좋은 이유에 대해 현실감 있고 세속적인 아주머니의 기준에서 설레발치며 좋아했던 내 모습은 29살 6급 예산담당 주무관에게 엄청 까이며 온데간데없이 매우 숙연해졌다.
"나: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직 신입이고 부족한 점이 많고, 미리 챙길 수 있는 부분도 해야 하는 것인지 몰라서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내 일상 속에 요즘 내가 매우 자주 하는 말이 바로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이다.
그래. 내가 알아보고 바로 말해준다고 했는데, 지금 출장 가야 한다고 했는데도 꼬치꼬치 물어보고 지금 갖고 오라고 하고 29살, 새파랗게 어린것이 40살 아주머니에게 큰 소리 내는 것.
나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늦게 들어왔으면 나이 많아도 나이 어린 상사에게 고개 숙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머릿속으로는 매우 잘 알고 있고 마음속으로 새기고 또 새겼는데 그리고 또 내 나름대로 잘 실천하고 있는데 막상 어린애에게 혼나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든다. 나이 어려도 본인이 맡은 사업이 중요하고 신경질 나고 하면 주변사람 많아도 40살 신입직원에게 소리 지를 수 있는 것.
내 체면이고 나발이고 내 상황이고 아무 상관없는 것.
바로 공무원 사회는 나이가 아니라 "급"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늦게 들어와서 안 좋은 이유는 급이 낮다는 것이다. 물론 7급 시험, 5급 시험을 쳐서 들어왔다면 나이가 많아도 급이 높을 수 있다. 그런데 내가 9급으로 들어와 가지고 나이가 많은데 급까지 낮으니 29살 6급에게 혼이날 수 있는 것이다. 근데 이 와 중에 내가 나이가 많아서 좋은 이유를 찾아냈다.
그건 바로 그렇게 혼이 났는데 29살 6급 애가 이해가 간다는 것이다.
물론 표현방식은 애가 참을성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 속에 나에게 갈구듯 면박 준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했다. 근데 내가 예산 담당이었다면 답답할 만도 하다 오히려 저렇게 일하는 게 조직에서는 일 잘하고 있는 거다.
걔가 밉지는 않았다.
왜냐면 나도 다른 데서 중책을 맡아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저런 일로 기분 나쁠 나이는 지났다.
(다행히)
근데 생각이라는 것은 자꾸 하게 된다.
공무원 사회는 나이보다는 "급"이 중요하고..
그리고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갑"이 되고..
근데 신입은 스스로 알아서 일을 배워야 하는 경우가 많고 친절히 알려주는 사람은 없으며, 인수인계도 굉장히 형식적인 편이다.
뭐 하나 제대로 처리하려면 구걸하듯 물어봐가지고 겨우 알아낸 다음에 처리하고
그나마 친절하게 잘 알려주는 공무원 동료에게 계속 물어보기 너무 미안해가지고 눈치 보고 또 눈치본 다음
겨우 문제를 해결한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공무원 조직 아니라도 인수인계. 친절하게 하는 사람 거의 없다.
그런데 생각이라는 것은 자꾸 하게 된다.
공무원 사회는 나이보다는 "급"이 중요하고..
그리고 일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갑"이 되고..
(자꾸 맴돈다.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다. 익숙해지고 몇번 더 해보고 몇 번 더 깨지다보면 나도 일잘러. 능숙러가 되겠지. 싶다가도 나 또한 답답하다. 일을 누구에게 잘 배울 수 있는 건지, 누가 잘 가르쳐줄 수 있는 건지. 알아 볼 만큼 알아보고 누군가에게 묻는데 그 시간이 너무 걸려서 나도 힘들다는 것.
신입의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일에 욕심있는 사람은 아니다. 힘이 빠지긴 하지만 여기서 주저할 내가 아니고 앞으로 이렇게 풀이 죽어가지고 조직 생활하기에는 내 인생의 시간이 아깝다. 내가 무지했던 부분은 실행 예산에 관한 부분이었다. "공부하면 되지!!!" 결심하고 예산관련 부분에서 내가 공부할 부분은 찾아봤다. 근데 도통 감이 안와서 내가 지금 뭘 챙겨야 하고 내가 지금 뭐 해야하는 것이냐고 마음 편한 직원에게 물어봤다. 그 직원분께서는 친절히 내가 뭐뭐뭐 해놨어야 한다고 조용히 일려주었다.
(그렇구나)

"내가 그걸 해놨어야 하는 구나. 이제 알았네."
이런 일들이 허다하다. 나는 지금 신입의 이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중이다.
외롭지만 그리고 미안하지만 주변에게 눈치껏 최대한 잘 물어보고 내공을 닦아내야하는 시기이다.
다행히 눈치보고 기다리면 잘 알려주는 마음씨 예쁘고 얼굴도 예쁜 주무관이 내 옆자리에 앉아계신다. 너무너무 고맙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50살 넘어서 들어온 내 동기(다른조직)가 있는데 들어오신지 1주일만에 의원면직(=퇴사)을 하셨다. 소문에는 조직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아 힘들어하셨다는데 아주 만약에 주변이 너무 삭막하고 알려주는 사람 전혀 없었다면 나도 1주일만에 퇴사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공무원 사회적응하는데에는 주변사람 운이 매우 중요하다.

어쨌거나 나는 더 나아질 결심을 해보았다.
주변에 의지할 수 있는 부분은 의지하더라도 나 스스로 내공을 쌓고 실력을 갈고 닦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단이 임신하고 공무원 시험 도전했던 포부와 같은 마음으로
나 스스로 내공을 갈고 닦아 보기로 했다.
캐캐 묶은 전공서를 책장에서 꺼냈다.
"표준품셈.
유리단가.
재료*할증률"
등을 찾아보았다. 다시 공부 시작이다.
대학 때 생각이 났다. 그리고 외모는 아니자만 뇌가 다시 대학 새내기처럼 풋풋해졌다.
더 나아지자. 그리고 깨질 수 있는 부분은 깨지더라도 내가 갖고 있는 내공으로 일을 더 정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보자. 노력해보자. 공무원 사회 급이고 나발이고
나 스스로 발전해보고 더 나아져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