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비워진 공간의 빛

솔크 바이오 연구소

by 김보아

“빛은 공간의 영혼이다.” - 루이스 칸



솔크 생물학 연구소(salk institute)를 방문한 건 2년 전, 늦여름 아들과의 여행 때였다. 대학생이 된 아들을 기숙사에 넣기 전에 이곳저곳을 여행하던 중이었다. 길고 긴 사춘기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기까지의 긴 여정 끝에 우리 둘이 도착한 이곳. 루이스 칸 (Louis Kahn)의 설계로 1963년에 개관한 이 연구소는 캘리포니아 샌디에이고 라호야의 해안 절벽에 자리하고 있다. 사진으로 보았던 광장에 들어서는 순간, 하늘과 맞닿은 태평양의 푸르름이 물채널을 지나 곧바로 나에게 와닿는 것 같았다.

IMG_1512.jpeg 광장에 서면 순환하는 자연의 섭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boah


광장을 중심으로 좌우로 나뉘어 있는 연구동은 서로 대칭을 이루는 구조로 지상 3층, 지하 3층으로 나뉘어 실험실은 아래층에, 위층에는 유틸리티와 사무공간이 있다. 노출 콘크리트로 지어진 벽은 광장의 바닥 재료로 쓰인 트래버틴과 색조와 거의 동일해 통일감을 만들어 낸다. 이 연구동의 라이트 웰(Light Well)은 연구동의 바깥둘레를 따라 약 깊이 12미터, 둘레 7.6 미터로 뚫린 수직 채광 공간으로 지하 2층에 위치한 실험실과 자료실까지 자연광을 끌어들인다. 이 장치는 빛뿐만 아니라 공기의 흐름까지 지상에서 이끌어 공간에 개방감과 쾌적함을 만들어 낸다. 연구동의 깊은 곳까지 빛을 끌어들인 라이트 웰처럼, 이 광장의 텅 빈 빛은 보는 이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하는 힘이 느껴졌다.


IMG_1698.jpeg
IMG_1682.jpeg
IMG_1592.jpeg
IMG_1691.jpeg
연구동의 곳곳 ©boah


비움 : 연구자의 수도원

루이스 칸이 이 건물을 설계할 때 중정 부분에 대한 고민을 안고 루이스 바라간을 만났다는 것은 꽤 알려진 이야기이다. 루이스 바라간은 “ 한 잎도, 한 꽃도, 흑도 두지 말라. 이곳은 정원이 아니고 돌로 된 광장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침묵과 비움의 공간에 하늘과 바다를 광장을 끌어들이는 것은 빛이었다. 비어 있는 공간의 고요함을 따라 하늘로부터 바다를 거처 지금 나의 발 밑을 흘러가는 물빛과 반짝임은 자연의 순수함, 있는 그대로의 우주, 순환하는 섭리다. 흘러가는 바람, 구름, 하늘과 바다와 수로에 담긴 물, 그것들은 그 자체로 충분하고 충만하였다.

아무도 말이 없고 그 누구도 소리를 내지 않는 광장, 사람들은 조용히 걷거나 한쪽에 앉아 말없이 광장을 바라보고 있다. 하늘은 하늘의 모습 그대로 구름이 흘러가면서 만들어 내는 모든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내리쬐는 태양이 광장을 숨죽이게 하면 바다 끝에서 이어지는 수로는 오히려 더욱 빛을 내며 반짝거렸다. 나는 그저 불어온 바람이 나의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꼈다. 그 작은 일렁임이 얼마나 나를 평안케 하는가.


저 멀리 아이가 홀로 걸어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어릴 적 떼쟁이 꼬마가 어느덧 자라서 이제는 더 이상 나의 통제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모든 갈등의 원인은 불안함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아이가 잘못될까 봐, 어려움에 힘겨워할까 봐 그토록 마음을 졸였던 시간들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태양 아래, 수평선을 가르며 걷고 있는 아이는 그저 또 하나의 자연이었다. 당연하고 또 본질적인, 부모의 생각으로 침범되어서는 안 되는 그 자체로 온전한 자연물이었다. 자연의 섭리 안에 있는 모습 그대로 바라봐 주어야 할 단 하나의 존재.


IMG_1517.jpeg 하늘, 바다, 구름, 새 그리고 사람 ©boah



나는 루이스 바라간이 왜 이 광장을 비워두라고 했는지 조금을 알 것 같았다.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의 시야를 가릴 때 텅 빈 공간에 서 있어 보라. 자연의 본질은 고마움이다. 우리는 꽃을 보며 나무라 되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맹수에게 왜냐고 묻지 않는다. 타자에게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요구하지 말아라. 나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알 수 없다. 모두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결국에는 이 생각만이 남겨질지도 모른다. 솔크 연구소의 '빛'이 단지 물리적인 태양빛이 아니라, 한 존재를 온전히 바라보게 하는 '이해의 빛'은 아니었을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