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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아 Jul 14. 2019

나를 어떻게 소개할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나를 소개한다는 건 내가 살아온 시간과 지금의 나를 한 문장으로 함축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무심코 표현한, 자기소개는 그동안의 삶에 대한 나의 태도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드러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작년 이맘때였나? 친구가 최인아 책방에서 하는 콘서트에 가자고 해서 참석했었다. 사실 그 날 연주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 갔었다. 시작 전에 머리가 히끗하신 남자분이 피아노로 리허설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 오늘 연주자이신가 보다 짐작했다. 음악회가 시작하고 그분이 자기소개를 하시는데 "저는 피아노 치는 OOO입니다"라고 간단한 인사말을 하시고 바로 연주를 하셨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소유냐 존재냐"에서 서구사회에서 명사의 사용 증가와 동사의 사용 감소가, 인간이 소유와 존재 가운데 어느 편에 치중해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명사는 사물을 지칭하는 말로 소유개념을 말할 때 쓰이고, 동사는 과정의 행위를 표현하는데 쓰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명사의 사용 증가는 인간의 행위가 소유개념으로 표현되는 빈도가 많아졌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말을 "나는 문제를 하나 가지고 있다"라는 식의 표현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을 내가 소유한 무엇으로 대체하여 문제를 변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저런 어려움에 대한 추상적 표현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세계에 대한 나의 관계는 나의 것으로 만드는 관계,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관계이고 존재적 실존양식은 생동적이며 실체적인 관계, 한 인격에 내재한 참실재라고 설명한다.



멈춰서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끔 생각해 보고 있나요?




에리히 프롬은 학습에 대해서도 소유와 존재의 양식으로 구분된 인간을 설명한다. 소유적 실존양식에 길든 학생들은 강의의 모든 내용을 놓치지 않고 모조리 기록하고 암기하여 시험을 치른다. 그러나 그들 고유의 사고체계를 풍요롭고 폭넓게 하는 구성요소가 되지는 못하며 오로지 한 가지 목표, "학습한 것"을 기억 속에 새기거나 보관해서 굳게 지키고자 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생산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존재양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는 학생들은 수동적으로 듣는 것을 받아 적기보다 능동적이고 생산적인 태도로 경청하고,  수용하고 대응한다. 고유의 사유과정을 통해 새로운 의문, 관념, 전망을 떠올린다.


"그렇지만 살아있는 인간의 현실, 그의 사랑과 미움, 고뇌로부터 본다면 동시에 생성과정과 변화를 겪지 않는 존재란 하나도 없다. 생명이 있는 유기체는 생성을 겪는 한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변화하는 한에서만 실존할 수 있다. 생장과 변화는 삶의 과정에 내재한 특성인 것이다"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중에서)




그날 음악회에서 연주자분은 자신을 소개할 때 피아니스트 혹은 음대 교수로 말씀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분의 화려한 수상경력을 생각하면 그렇게 단순하게 "피아노 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실 일이 아니었다. 아마도 그분은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서 혹은 음대 교수가 되기 위해서 살아오셨다기보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으로 살아오시지 않았을까? 불변의 타이틀을 소유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하는 모든 세월의 흐름 속에서 생동하는 존재로서의 살아오셨으리라. 그래서 고희를 넘기셨으나 여전히 피아노와 함께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스케이트 선수였던 이규혁 선수는 은퇴하면서 "올림픽은 핑계였을 뿐 사실은 그저 스케이트가 타고 싶었다"라는 고백을 남겼다. 올림픽 메달을 목표로 하기보다 스케이트 타는 것을 즐겼던 자신의 삶의 여정에 대한 소회로 여겨진다.




나는 나를 어떻게 소개하고 있을까?  누군가의 관계속에서의 소개든, 나의 직업을 이야기 해야 하는 경우든 명사가 아닌 동사로 표현을 해보자. 그러면 나도 몰랐던 나의 인식, 관계에 대한 태도, 직업의식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된다. 나는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변화하고 생장하고 있는지 아니면 늘 같은 태도와 생각으로 항존하고 있는지 말이다. 목표를 이루어 그것을 소유하는 삶의 양식보다 살아가는 과정속에서 반응하고 넓어지고 깊어지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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