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냐 왕위냐, 700년 전 왕의 고민

『용재총화』, 충선왕과 이제현의 일화

by bbj


양자택일, 그리고 제 3의 길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에게 양자택일의 상황이 찾아온다. 가족이냐 일이냐, 사랑이냐 성공이냐, 효율이냐 인간애냐. 화면 앞에서 ‘나라면 어떻게 할까?‘를 주인공과 같이 골똘히 고민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대개 그 모두를 다 얻는 제3의 대안을 마련해 멋지게 양자택일의 딜레마를 해결해낸다. 현실에서는 참 쉽지 않기에, 요행히 제3의 길을 찾아낸 그 장면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놓였던 수많은 양자택일의 상황을 떠올려 보며 상상한다. 만약 그 중 하나의 선택을 되돌릴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지금보다 더 달라졌을까?


700년 전에도 양자택일의 순간은 있었다. 무려 ‘왕위냐 사랑이냐’. 왕까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쯤은 쉽게 포기할 수 있지 않을까 혹은 쉽게 다 가질수 있지 않았나 싶지만, 그렇지 않았나 보다.


연꽃 한 송이의 이별


고려 후기 원나라에게 침탈당한 이후, 고려의 왕들은 원나라 왕실의 부마가 되어 원나라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충선왕은 충렬왕과 원나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왕이다. 그에게는 오랜 기간 원나라에 머물며 정든 여자가 있었는데, 고려에서의 왕위 계승 목적으로 귀국하게 되자 그 여자가 뒤따라왔다. 충선왕은 연꽃 한 송이를 이별의 정표로 주고 그녀를 힘겹게 돌려보냈다.


하지만 그리움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충선왕은 자신을 보필하던 신하 이제현을 시켜 그 여자의 소식을 알아보게 했다. 이제현이 찾아갔을 때, 그녀는 다락 속에서 고독하게 지내며 이별의 후유증으로 말도 잘 하지 못하고 있었다.


시들어버린 사랑


이제현의 방문으로 그녀가 억지로 붓을 들어 시를 쓰기를 “보내주신 연꽃 한 송이 처음엔 분명하게 붉더니, 떠난 지 이제 며칠, 사람과 함께 시들었네.”


왕이 있는 곳으로 돌아온 이제현은 차마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여자는 술집에서 젊은 사람과 술 마시며 지내더라”고 고했다. 왕은 여자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침을 뱉었다.


다음 해 임금의 생일이 되자 이제현은 사실을 고백하고 사죄하며 그 여자의 시를 올렸다. 그러나 왕은 “이 시를 보았다면 죽을 힘을 다해 돌아갔을 텐데, 경은 나를 사랑하여 딴 말을 했으니 참으로 충성스럽다”고 했다.


이름 없는 이의 자리, 만일 나였다면


사랑을 버리고 나라를 택한 왕과, 그 길로 이끈 신하의 이야기. 그러나 그 여자는 어찌 되었을까. 한때 왕의 열렬한 사랑이었던 이 이름 모를 이 여성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역사는 늘 권력자의 선택만을 남긴다. 그 이면에 남겨진 이름 없는 이들의 자리와 슬픔을 생각하게 된다.


내가 왕이라면, 내가 신하라면, 내가 여자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히 본다. 최선의 선택이란 무엇일까. 그런 건 존재할까? 누군가의 책임, 누군가의 행복,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우리는 늘 고민하고, 때로는 후회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간다.


매일 수많은 선택과 질문을 헤치고 나아가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700년 전의 이 장면이 잔잔한 파문을 남긴다.


오늘, 당신은 어떤 선택 앞에 서 있나요?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티베트 사원 벽화에 그려진 충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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