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수 있음에 감사하며
어릴 적 과학시간에 ‘플라나리아’라는 작은 생물에 대해 배운 기억이 난다. 몸의 일부가 절단 되어도 다시 자라고, 자란 몸의 일부가 새로운 개체가 된다는 생물.
불가사리도, 지렁이도 그렇다던가. 잘린 부분이 새개체가 되는 건 아니라도 잘려진 채 살아갈 수 있다는 게. 그 작고 눈먼 꾸물거리는 생물의 그 고통과 인내심, 결단이 인간인 나보다 한층 단호해 보였다.
식물도 그럴 수 있다는 걸 키우며 처음 알았다.
씨앗부터 틔운 식물들도 남다르지만 특히 어떤 부득이한 이유로 가지나 줄기의 중간을 자르고 그 부위에 새 뿌리가 나길 바라며 다시 키운 식물들은 마치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돌아온 듯이 경이롭다. 그들의 생에 대한 의지와 단호함은 더욱 인상적이다.
너와 나의 추억을 연장할 수 있어 다행이구나, 너의 결심으로 우리 추억이 현재 진행중일 수 있었다. 물속에서 기어이 뿌리를 내 주어서 고맙다. 뿌리가 충분히 자라면 다시 네가 있던 흙에 심어 줄게.
그 하얀 뿌리는 흙을 뚫고 빼꼼 얼굴 내민 연약한 새싹처럼 감동스럽고도 비장하다.
여기 식물 연재 시리즈에 적었던 화이트 스타와 마리안느 둘다 그렇게 올 봄에 재기할 기회를 얻었다. 지난 겨울 맹추위에 열어 놓고 간 창문에 동사 직전까지 갔던 것이다. 평소 강하게(사실 약간 대충) 키우는 나의 안일함과 부주의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둘 다 가버리나 싶어 너무 안타까우면서 쉽게 포기가 안 되었다. 겨울이라 다시 살아나기 더욱 힘들 것 같았지만, 화이트스타는 가지치기를 했고 마리안느는 심겨 있던 화분에서 통째로 뽑아 물에 담그고 뿌리가 돋아나길 기다렸다.
그 기다림 끝에 물 속에서 뿌리를 하나 둘 내밀었을 때,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갓 태어난 아기 입에 돋아난 새 이빨을 보듯 경이로우면서, 강인한 의지와 힘을 함께 느꼈다.
이렇듯 식물들을 키우고 살리고 다시 키우길 반복하며, 생명을 받은 존재들이 어떻게든 그 생명을 연장하겠다는 그 일념이 만들어낸 작은 기적들을 마주치곤 한다. 희미한 가능성 하나 더듬어 보겠다는 듯 물속에서 손을 하나둘 뻗어내던 뿌리들.
사람도 생명이지만, 생명을 받았으니 일단 최선을 다해 살아나간다는 생각이 식물들만큼 그리 당연하고 뚜렷하며 절실하진 않은 것 같다.
물론 차분히 성찰하고 돌아보면 우리 생은 저마다 비할 바 없이 소중하고 무거운 책임을 갖는 것이지만. 끊임없는 비교와 효율 추구와 사회적 잣대 속에 외적인 기준에 맞추느라 에너지를 소진하다보면
‘다 죽어 갈 지경에 한 접시 물을 만나 기어이 뿌리내리는’ 힘이 남아 있을는지. 생명 본연의 논리로 곧장 나아가기에 인간은 겹겹이 너무 많은 허울을 쓰고, 혹은 자진해서 그걸 덮어쓰며 살아가지 않나.
다시 살아가는 의무를 위해서
물로, 볕으로, 흙으로
한치의 망설임없이
곧장 나아가는 뿌리들.
그 간결함과 단호함. 생의 논리를 이끄는 대전제 앞에서는 다른 무엇들은 다 잡념이고 소음일 것이다.
다시 뿌리를 내려 생명임을 온몸으로 말하는 식물들에 대해 쓰면서 그들이 가르쳐준 것을 되새긴다.
살아가는 것보다 살아있는 것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사실 이렇게까지 비장해질 줄 몰랐다. 다시 살린 식물들이 있다는 걸 자랑삼아 가볍게 적어 볼 생각이었건만 쓰다보니 물속에서 뿌리를 뻗어내던 모습들이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어떻게 알고 오시는지 꾸준히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홍보를 따로 안해도 어디엔가 어떤 방식으로 글이 뜨는군요. 이것도 인연인데 감사드려요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