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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Apr 21. 2019

대한민국의 녹색 어머니들께


녹색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 한 마디를 드리고 싶어 지금부터 구구절절 쓰겠습니다. 아이들 챙겨 보내기도 복잡한 이른 아침에 녹색 조끼를 입고 노란 깃발을 휘날리시는 대한민국의 모든 녹색 어머님들께 순수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어 쓰는 글인데 좀 길지만 끝까지 읽어 주세요.       


올해 들어 일기가 고른 날이 거의 없습니다. 덥던지, 춥던지, 먼지가 심하던지, 비가 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8시 30분이 되면 어김없이 그 자리에 서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의 수고를 몰라준다 생각하실까봐 이렇게 한 자씩 꾹꾹 씁니다. 다만 초면인 우리 사이에 무작정 다가가 감사 인사를 드리기가 영 쑥스러워 그렇습니다. 서글서글하지 못한 저를 이해해주세요.   

   

아이를 입학시키고 녹색 어머니가 되어보기 전에는 그게 그리도 번거로운 일인 줄 몰랐습니다. 그 조끼를 직접 입기 전까지 학교에 10년 넘게 근무하면서도 출근길 녹색 어머니들의 모습은 그저 당연한 풍경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기에 시간 되고 형편 되는 엄마들이 조금만 수고하면 되는 별거 아닌 일로 생각했습니다. 그까짓, 녹색 어머니쯤이야. 얼핏 재미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조송합니다. 큰아이가 1학년 입학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 야심 차게 녹색 어머니 봉사를 신청했습니다. 담임을 해보니 매년 초에 봉사활동 해주실 어머니를 모집하는 게 쉽지 않더군요. 우리 아이 담임 선생님도 힘드시겠지, 싶은 마음에 선생님께 잘 보이고 싶어 지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 더 예뻐해 주시겠지 하는 기대감에 선뜻 아이 이름을 적어냈습니다. 곧 봉사 날짜를 알리는 연락이 왔고 스마트폰에 알람을 맞춰 놓고 탁상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도 그렸습니다. 툭하면 깜빡깜빡하거든요. 


드디어 녹색 어머니 첫날이 다가왔습니다. 

평소보다 일찍 등교시켜야 해서 부산을 좀 떨었습니다. 민얼굴로 나갈 수는 없으니 한 듯 안한 듯 자연스러워 보일 선크림과 비비크림을 찍어 바르고, 입술도 살짝 발랐습니다. 형광 연두색 조끼와 어울릴만한 무난한 검정 잠바는 지난 밤에 미리 결정해 뒀구요. 아이들은 엄마가 학교 앞을 지킨다는 사실을 신기해하기도, 즐거워하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니 저도 엄청 좋았습니다. 소소한 행복감도 듭니다. 한가한 틈을 타 셀카도 찍었습니다. 물론 조끼와 깃발이 잘 나오면서 제 얼굴도 괜찮게 나온 셀카를 건지는 건 보통 일이 아니더군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결국 한 장 건졌습니다.


더 보통이 아닌 일은 따로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임에도 불구하고 슬그머니 신호를 위반하고 건너려는 차를 노려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깃발을 흔드는 일, 초록불이 깜박거리며 끝나가는데 저 멀리서 전력 질주해오는 아이를 붙잡아 세우는 일, 추운 날씨에 30분 동안 같은 자세로 덜덜 떨고 서 있는 일은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끔 만나는 아는 얼굴에게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주기도 해야 했고요, 아이의 등굣길을 함께 하시는 어느 할머니의 잔소리도 들어야 했어요. 어린이보호구역 표시가 눈에 덜 띈다며 이건 문제가 있다고 지적을 10분도 넘게 하시더군요. 저보고 어쩌란 말씀이신가요. 한참 잔소리를 듣다가 신호가 바뀐 줄도 모르고 깃발 방향을 반대로 들고 있기도 했어요. 그렇게 30분을 보내고 집에 들어오니 얼었던 몸이 슬슬 녹습니다. 따뜻한 물을 마시고 한참을 온수매트에 지지고 나니 좀 낫더라구요. 그렇게 내리 3년을 녹색 어머니로 활동했습니다. 추운 날이 물론 가장 힘들고요, 여름, 가을의 따가운 햇빛도 만만치는 않았습니다. 3년간 두 아이의 녹색 어머니를 모두 지원 했더니 제법 자주 날짜가 돌아왔어요. 새까맣게 잊고 못 나가 펑크를 낸 날도 하루 있었구요, (정문 앞 신호등 자리가 비어있다며 녹색 대표 엄마에게 연락을 받고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는지 모르겠습니다). 늦게 나가 10분밖에 못하고 들어오기도 했어요. 얼마나 민망하고 부끄럽던지 말이에요. 정신줄을 꼭 붙잡고 살아야겠어요. 




지난 번 근무했던 학교에서는 조금 색다른 규정이 하나 있었어요. 그 날 봉사하시는 녹색 어머니의 담임이 반드시 신호등 앞에 나가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었어요. 아이 위해 수고하시는 건데, 담임 선생님이 몰라주면 그분들은 무슨 보람으로 봉사를 하시겠냐는 교장 선생님의 뜻이었습니다. 저는 좀 고분고분한 사람인지라, 교장 선생님의 지시에 열심히 따르는 편이에요. 아무리 바빠도 저희 반 어머님들이 봉사하시는 날, 잊지 않고 나가 감사 인사를 드렸어요. 그런 형식적인 인사에도 어머니들은 정말 감사해하셨어요. 제가 그분들을 향해 걸어갈 때 환한 표정으로 반가워하시던 어머니들의 표정이 지금도 생각날 정도니까요. 누군가에게 기쁨과 웃음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게 좋았습니다. 담임 맡은 우리 반 녹색 대표 어머니께 정말 감사드린다고, 진짜 힘드신 거 잘 알고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배시시 웃으시네요. 알아주셔서 감사하다고요. 수고한다는 말을 들으니 참 좋고, 다른 어머니들께도 꼭 전해드리겠다고 하시네요.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인 거, 아실까요? 제 인사 속에는 절절한 진심이 담겨 있었던 것도 아실까요.




직장을 핑계로 올해는 녹색 어머니 봉사를 지원하지 못했어요. 학년 초 봉사활동 지원서를 받고 이틀을 꼬박 고민했어요. 눈치 보며 직장에 허락받고 무리하게라도 지원해야 할까, 아니야 내가 굳이 지원하지 않아도 누군가로는 채워질 거야 모른 척하자.  쉬운 편을 택했는데 마음은 불편하네요. 오늘 아침에도 우리 아이들 학교 앞 신호등에는 누군가의 엄마들이 깃발을 흔들고 지키고 계셨겠죠. 덕분에 아이들은 학교에 무사히 도착을 했을 거고요. 신호등이 켜지면 옆도 한 번 안 쳐다보고 오직 직진만 하는 아들놈들이라 고학년이 됐는데도 불안할 때가 있어요. 모두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작년에 배우 고소영씨가 자녀 학교 앞에서 녹색 어머니 봉사활동을 하던 중에 찍힌 사진을 봤어요. 다들 보셨죠? 어쩜. 그녀는 왜 바쁜 아침 시간에도 그렇게 예쁜 걸까요? 그렇게 예쁜 녹색 어머니가 어디 있냐고요. 반칙 아닌가요. 예뻐서 괜히 시비 거는 겁니다. 이해해주세요.      


전국의 모든 녹색 어머니, 뜨거운 여름에는 아무리 바쁘셔도 선크림 꼭 바르고 나가시고요, 선글라스도 챙기세요. 엄마의 피부는 소중하니까요. 그럼, 내일 아침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자녀교육에세이 [그렇게초등엄마가된다] 더 진한 이야기는 책으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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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Writer  매일 읽고 날마다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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