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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Apr 14. 2019

천기누설, 성적표 번역기

전국 유, 초, 중, 고교 교사 글짓기 숙제인 학기말 성적표. 그 중에서도 성적표의 핵이라 할 수 있는 맨 뒷장, 맨 아랫칸의 ‘종합 의견’에 대한 이야기다. 한 학기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지나야 한다. 나처럼 글쓰기 좋아하는 교사도 성적표 시즌이 되면 마음이 묵직하다. 이것은 글쓰기 실력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간혹 예능프로그램에 연예인들 초등 시절 성적표에 적힌 문장에 사람들은 웃는데 그 한 문장을 썼을 담임 교사의 고심을 나는 안다. 한 줄 입력도 조심스러워 며칠을 고민하여 간신히 쓰고 마음에 걸려 또 고쳤으리라. 제출 직전까지도 다시 한번 더 읽고 고칠 곳을 찾았을 것이다. 한 아이의 생활, 학습, 인성을 종합하여 서너 줄로 압축시켜야 하는 고난도 글짓기다. 잘한 점은 칭찬해주고 부족한 점은 기분 나쁘지 않게 살짝 에둘러 표현해야 한다.


직설에 비해 간접 화법은 고민의 품이 몇 배는 든다. 꼭 고쳤으면 싶고 부모님이 꼭 아셨으면 하는 아쉬운 부분을 예민하지 않은 단어들로만 적어야 한다. 너무 까다로운 원칙이다. 해가 갈수록 학교를 향한 곱지 않은 시선과 갖가지 민원이 많아지니 교감, 교장 선생님은 당부를 하신다. 제발, 굳이 안 좋은 말은 기록하지 말라고. 그저 좋은 점을 있는 대로 찾아내 칭찬만 듬뿍 써주라고. 안 좋은 말을 기록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이의 모든 부분을 언급하기 어렵기 때문에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그 이름이 ‘종합의견’이다. 고쳤으면 싶은 점이 없는 흔히 말하는 ‘범생이’들의 종합의견은 칭찬 대잔치다. 쓰기 쉽다. 칭찬의 언어는 이래도 저래도 괜찮다. 칭찬은 직설적인 게 최고다. 술술 써진다. 쓰다 보면 더 쓰고 싶게 장점이 계속 생각난다. 나는, 그리고 그런 아이가 아닌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나는 지금도 교실 안의 그런 아이들이 부럽다. 반면,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아이도 있다. 규칙을 자주 어기거나 버릇없는 행동으로 툭하면 꾸중을 듣는 아이들이 그렇다. 장점도 많지만 꼭 고쳤으면 하는 이걸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이런 아이들에게도 칭찬 대잔치를 벌이는 건 무책임한 거다. 고치고 나아질 부분이 있다면 그걸 알리는 것이 교사의 의무다. 어떻게 알려야 지혜로울까. 어떻게 알려야 부모님이 척하고 알아차리실까. 그게 어렵다.      


교사들끼리는 ‘성적표 번역기’가 따로 있어야 할 정도라며 직설적으로 쓰지 못하는 문장들에 대한 한스러움을 나눈다. 속뜻이 따로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면을 빌어 간단히 성적표를 번역해보려 한다.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이며, 오탈자 수정을 위해 성적표를 교환해 점검했던 같은 학년 선생님들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하지만 아랫글을 읽는 교사라면 누구든 ‘맞아맞아맞아’라며 끄덕거리리라. 종합의견 멘트에 담긴 속뜻은 우리 업계의 영업 비밀 같은 거라 공개가 조심스럽다. 그럼에도 적어본다. 내가 글을 쓰고 책으로 엮어내는 이유는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것이기에 자녀교육에 조금이라도 참고하시라는 마음에서 적어본다. 이런 뜻이었구나, 웃고 넘어가주시길.      


"감수성이 풍부하고 남다른 개성을 지녀 다른 사람에게 휩쓸리지 않고 나름대로 정해진 원칙과 계획대로 행동하며 설득력과 언어 능력이 뛰어남“

-> 감동적인 영상을 볼 때 눈물을 흘리더라구요. 일기나 독서록에 자기의 느낌을 풍부하게 쓰는 편이에요. 자기 고집이 있고 주관이 뚜렷하여 하라는 대로 하기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할 때가 많아요. 친구들에게 이것저것 하자고 먼저 제안을 해서 자기 뜻대로 결국 이루어내는 스타일이고요, 평소에 말이 많은 편이에요. 또래보다 수준 높은 단어를 많이 알고 있고 자기 의견을 논리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인 자료를 학습에 활용할 줄 알고, 학습 문제에 대한 토의를 잘 하며 학습과제를 성실하게 하고 바른 학습 태도로 수업에 임하므로 전 교과 성취도가 높아 더 큰 발전이 기대됨“

-> 우리 반 최고의 범생이라는 뜻이에요. 학습 능력이 뛰어난 것은 물론이고 성실한 태도까지 매우 훌륭해요. 더 큰 발전이 기대된다는 건 이 아이가 필히 뭘해도 하겠다 싶은 뛰어난 아이라는 뜻이에요. 대단한 칭찬의 멘트입니다. 반에서 상위 두세명 정도의 아이들에게만 적어주는 흠 없고 순결한 칭찬 전용 종합 의견이에요.      


"수학과 학습에 흥미를 가지고 문제를 풀며 응용력과 수리력, 학습 사고력이 뛰어나고 다른 친구들보다 많이 알고 있는 내용에 대해 자부심이 있어 수업 시간에 매우 활발하게 임함“

-> 수학을 잘하는 아이에요. 잘 하는 것에 대해 아는 척을 많이 해요. 한참 설명을 하고 있으면 ‘나 저거 아는데’라고 혼잣말을 하거나 ‘아, 너무 쉬워’라는 얄미운 소리를 하기도 해요. 수학 시간에 앞에 나와 대표로 풀거나 질문에 답하기를 매우 열심히 하는 아이죠. 반면 수학을 제외한 과목엔 흥미가 없거나 어려워하여 과목별 편차가 큰 편입니다.      


"또래 친구 사이에서는 별문제가 없지만 학교와 학급 규칙을 잘 지키려는 태도와 웃어른의 올바른 지시를 받아들이는 자세가 부족함“

-> 친구들과는 잘 지내지만 규칙을 잘 어기고, 담임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지도해도 그것을 가벼이 여겨 또 어기는 아이랍니다. 혼내면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기도 하구요, 반항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한마디로 좀 멋대로 하려고 하는 아이예요. 여간해서는 ‘부족하다’는 표현은 자제하는 편인데, 이렇게까지 써 있으면 여러 번 그런 모습을 보였다는 의미로 보시면 되요.    

 

"언어 행동에 관한 학급 규칙을 어긴 적이 있으나 정해진 규칙에 의한 벌을 받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언어 습관을 지니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다른 친구들의 모범이 됨  “

-> 나쁜 말을 일찌감치 배워 친구들에게 욕을 전파한 어린이입니다. 눈물 빠지게 혼이 났었고 안하기로 약속했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모님과 선생님 안 계신 곳에서 욕을 쓸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세요.       


"평소 지각 및 학급 규칙을 지키지 않아 많이 지적받는 편임 앞으로 규칙을 준수하는 태도를 함양한다면 향후에는 모범적인 생활 태도를 가진 학생으로서의 변화가 기대되는 학생임“

-> 자꾸 지각을 하는데, 학교에 좀 빨리 챙겨 보내주세요. 게다가 복도에서 뛰어 다니고 교과서를 챙겨오지 않고 수업 시간 준비도 잘 안 되는 편이에요. 거의 매일 꾸중을 듣지만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네요. ‘변화가 기대되는 학생’이라는 건 적어도 아직은 거의 나아진 게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해도 좋습니다.      


"장난기가 많고 성격이 활발하여 친구들이 좋아하고 이에 따라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으며 새로운 일에 관심과 호기심이 많아 질문도 잘하며 전반적으로 외향적인 성격임“

-> 쾌활하고 웃음이 많고 재미있는 아이라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요. 학급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알아내고자 하며, 항상 질문이 많은 아이에요. 언제나 시선을 집중시키는 존재감이 아주 큰 아이랍니다. 친구들과 잘 지내고 본인도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해서 고맙지만, 질문이 많아 버거울 때도 있어요.      


"학기 초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친구 관계 형성에 어려움이 있었으나 학급 전체 게임 활동 등을 통해 친구들과 함께 많이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음. 보다 적극적이고 진솔한 자세로 친구들에게 다가간다면 교우관계에 있어서 신망이 두터워질 것으로 기대됨“

-> 학기 초보다는 좀 나아졌지만, 여전히 친구들과 활발하게 잘 어울리지는 못하고 있어요. 혼자 지낼 때도 있고, 소수의 친구와 어울리는 정도입니다. 친구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어요.      


"밝은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이 좋게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장난이 조금은 있어 조절하는 힘이 필요함“

-> 한없이 해맑고 천진하여 귀엽긴 하지만 친구들에게 심한 장난을 치고 진지함이 부족합니다. 제 나이보다 좀 어린 편이에요. 장난을 적당히 하면 좋은데 심하게 할 때도 있습니다. 장난만 좀 적당히 하면 정말 귀엽고 예쁜 아이에요.      


슬슬 또 슬금슬금 학기 말이 다가온다. 이런 시즌엔 종합 의견에 어떤 말을 적어주면 좋을까 하는 고민으로 교실의 아이들 얼굴을 바라보게 된다. 아이들 행동 하나하나, 했던 말들 하나하나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어떤 말이 이 아이를 훌쩍 자라게 도울까. 어떤 말이 이 아이를 키워낼 부모에게 적절한 도움이 될까. 써냈던 몇 권의 책보다 어려운 숙제다. 이번 학기, 내게 주어진 스물네 편의 글짓기 숙제를 무사히 완성하기 위해서는 달달한 아이스커피가 필요하겠다.      



자녀교육에세이 [그렇게초등엄마가된다] 더 진한 이야기는 책으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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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Writer  매일 읽고 날마다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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