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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경 Jan 13. 2019

제가 그런게 아니라 제 눈이

눈이 밝아 슬픈 여자의 오해받아 마땅한 이야기 

타고난 것들 중 가장 만족스러운 유전자는 시력이다. 시력이 유난스럽게 좋다. 한창 때는 무려 2.0을 기록한 적도 있으며 평균적으로 1.5 정도는 거뜬하다. 올해 마흔, 아직 노안 소식은 없지만 최근에 했던 시력 검사에서 결국 1.0이라는 안 좋은 결과를 받았다. 이것은 마치 체중 42키로의 여자 아이돌이 티비에 나와 요즘 살이 너무 많이 쪄서 고민이라는 말을 늘어놓는 것처럼 별 아니꼬운 투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시력은 생각보다 훨씬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고 덕분에 많은 불편함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시력이 좋다는 건 당신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훨씬 가뿐하다. 뿌옇게 흐려지는 렌즈 때문에 라면 먹는 속도가 늦어지는 일 없이 지금껏 무수한 면발을 속도감 있게 먹어치워오고 있으며, 칠판 글씨가 보이지 않아 미간을 찌푸려본 적도 없다. 수경이나 선글래스를 고를 때 신경 쓸 것도 없다. 안경 쓴 사람들은 이런 나를 당연히 부러워하지만, 어떤 좋은 일도 항상 좋지만은 않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라는데 시력이 유난히 좋다는 게 안 좋은 일이 분명 내겐 있었다. 


유난히 밝은 눈은 시험 때마다 시험에 들게 했다. 옆자리, 앞에 옆자리 친구의 시험지 정도는 그냥 훤히 눈에 들어온다. 정확히 보이지 않아 고개를 앞으로 쭈욱 빼거나 글씨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스윽 보기만 하면 저 건너 앞자리 시험지에 적힌 글씨들이 보인다. 어쩔 수 없는 유혹이다. 3번인지 5번인지 매우 헷갈리는 문제를 고민하다가 살짝 고개를 들었는데 주변 친구들 세 명의 답란에 5라는 숫자가 적혀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면 나는 굳이 3번을 체크 할 이유를 모르겠다. 못 이기는 척 3번을 쓰고는 과하게 밝은 눈을 탓한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너무 좋은 시력 탓에 어쩔 수 없었던 거라며 무죄인 척을 한다. 제가 훔친 게 아니에요, 제 손이 훔친 거에요 라는 핑계를 대는 뻔뻔한 도둑처럼 말이다. 


틈이 보이기만 하면 그 밝고 환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공상을 하는 멍한 스타일의 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입시 날, 마지막 과목인 논술 시험 시간이었다. 잘생긴 총각 선생님이 시험 감독으로 들어오셨다. 잘생긴 총각 선생님은 시대와 연령을 초월하여 환영받는다. 시험 시간 중 좀처럼 긴장을 하지 않는 사차원의 두뇌구조 탓에 그 날도 시험지를 받아들고 늘 하던 공상을 시작했다. 사각대는 연필 소리만 들리는 시험 시간은 평소에 자주 할 수 없는 깊은 사색을 하기에 제격이다. 시험지에 얼굴을 파묻고 미친 듯 써 내려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도 바쁜 게 없었다. 친구들의 답안지는 뻑뻑하게 가득 차 있어 굳이 읽고 싶지 않았다. 물론 마음만 먹는다면 모두 읽어낼 자신이 있었다. 잘생긴 선생님의 선한 눈길이 내게서 멈추었다. 분명 의심하셨으리라. 친구들 시험지를 베끼기 위해 애쓰는 여학생을 집요하게 감시하셔야만 했다. 한 자라도 더 열심히 쓰고 지우고 하며 칸을 메워야 할 시간에 내가 한 일은 교실 책상에 나란히 걸린 친구들의 가방에 적힌 영어 단어들을 읽는 일과 그녀들의 점퍼 브랜드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나이키나 이스트팩, 아이다스와 필라처럼 흔한 것들 때문에 그마저도 싱겁게 끝나버리면 창가 너머로 눈길을 주며 눈에 띄는 대로 근처 상가의 간판을 읽었다. 문구사 간판 아래 가게 전화번호, 미용실의 이름과 영업시간, 학원에서 가르치는 과목의 종류까지. 그것도 지루해지고서야 슬슬 답안 작성을 시작하였고 그럭저럭 시간에 맞추어 답안지를 빼곡히 채웠다. 그 때나 지금이나 빠른 속도로 쓰는 일만큼은 자신 있다. 망치진 않았나 보다. 덕분에 지원했던 그 학교에 무사히 입학했으니. 

입학 후 첫 사회 시간. 그 때 그 잘생긴 총각 선생님이 교실로 성큼 들어오셨다. 게다가 키도 크셨으니 스승의 은혜는 정말이지 하늘과 같다. 잘생긴 총각 선생님의 얼굴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잘생긴 총각 시험 감독 선생님도 좋았지만 잘생긴 총각 사회 선생님은 몇 배 좋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규칙적으로 만날 수 있다. 반가운 마음에 두 손을 턱에 괴고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한 명씩 출석을 부르겠다고 하시던 선생님은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셨다. 잘생긴 총각 선생님은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순수한 얼굴을 갖고 계셨다. 왜 그리 놀라셨을까. 나중에 이유를 여쭈어보았더니 내가 이 학교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너무 놀라웠단다. 입시를 완전히 포기한 듯한 멍한 여학생 한 명이 시험 시간 내내 여기저기 두리번거리고 문제는 풀지 않아서 그 학생 감시하느라 시간 내내 아주 애를 먹었다고 하셨다. 합격 의지도 없는 학생이 시험장에 앉아 분위기만 흐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찼던 기억이 또렷했다며 도대체 너는 어떻게 합격하여 여기에 다니고 있는 건지 해명을 요구하듯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셨다. 눈이 작아도 잘생길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었다. 내내 멍때리다 마지막 30분 죽어라 써서 합격했던 논술 솜씨 덕분에 지금 이렇게 결국 글로 먹고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진정 신기한 일이 생기기까지 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까. 나의 이 모든 산만하고 의심스러운 행동들은 지나치게 밝은 시력 때문이라는 것을 우선하여 설명드렸어야 하는데 잘생긴 사람을 가까이서 보는 일이 황홀하고 행복하여 마땅한 대답도 못 드리고 정신없이 교무실을 빠져나와 버렸다. 

결국 모든 일은 밝은 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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