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주인과 심부름꾼

by 밈바이러스
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자기 자신을 “주인공!”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 예!” 라고 말했다. - <무문관> 12칙, 암환주인




주인(사용자)과 심부름꾼

이언 맥길크리스트의 책 <주인과 심부름꾼>을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책 제목이 너무나도 흥미로운 밈이라 그 비유만 사용해 보려 합니다. (데이비드 헤이그에 따르면 진화 역시 어떤 부품이 일단 쓸만하게 완성되면, 최소한의 개량만 거치며 잘 우려먹습니다.)


생각하는 마음을 도구로 진화의 혁신을 이루었지만 그 능력의 과잉 그리고 잘못된 자기 동일시가 자칫 병을 만들기도 합니다. 당신은 심부름꾼(자아)이 아닙니다. 언제라도 주인(사용자)이었습니다. 심부름꾼이 세상에 대한 오보(잘못된 해석)를 가져온다면, 그 심부름꾼은 보내고 다른 심부름꾼을 불러와야 합니다.


심부름꾼은 한순간에 하나의 과제를 위해 당신에게 고용된 홀로그램 같은 존재이며, 도통 자기를 치켜세우기 급급하지만 (실력도 좋고, 도덕적이며, 바쁘다) 실상 아는 것이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


다만, 왠지 뽑힌 심부름꾼이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우리는 기억(밈)을 기반으로 심부름꾼을 뽑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주인입니다. 심부름꾼은 자신이 주인공(main actor)인 줄 알지만 아닙니다. 우리 사용자가 주인공(空, 텅 빌 공)입니다. ‘공’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역시 본질적인 특성보다는 상황적 특성을 더 많이 보유한 흐름이자 수많은 자아가 왁자지껄 연기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배경으로 우주에서 따로 떼어낼 수 없으며, 주변의 이런저런 것들과 상호작용을 이어 가는 그 무엇이라는 뜻에서 사용했습니다.


주인공(空), 제 표현으로는 사용자. 이게 바로 진짜 당신입니다. 뇌에서 잠시 흘러가는 목소리나 이야기에 휘둘리지 않는 존재. 특정 이야기와 이유, 목적과 신념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것들을 소유할 수 있는 존재. DNA, 사회 문화, 개인적 기억, 그리고 주변 환경, 조금 더 넓게 보면 건너 건너 우주 전체와 연결된 존재.

심부름꾼이 오보를 가져오면,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다른 심부름꾼을 부를 수 있는 선택권을 가진 존재입니다.


고정불변한 심부름꾼(자아)은 없습니다. 제각기 고유한 시간대를 가진 심부름꾼들이 왔다가 갈 뿐입니다. 우리는 심부름꾼을 통해 사회에서 상호작용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심부름꾼을 불러올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단박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수많은 내적 갈등을 경험하는 것은 결정 장애 때문이 아닙니다.* 매 순간 수없이 많은 밈과 모듈이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 다른 여러 이야기를 제끼고 하나의 이야기가 선택받습니다. 그것이 지금 이 순간 꼴딱이는 일초살이 자아(심부름꾼)입니다.** 그 녀석은 그 전에 태어나고 죽었던, 그리고 훗날 태어날 녀석들과 수많은 밈을 공유합니다. 모든 생물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전자를 공유하듯이요. 뇌는 과거, 현재, 미래의 ‘나’(캐릭터와 심부름꾼)를 매끄럽게 연결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만 지금을 경험하고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싯다르타는 수천 번 자아로부터 도망쳐 무에 머물렀다. 하지만 짐승 속에, 돌 속에 머무른다 할지라도, 결국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고,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다시 자아였고, 싯다르타였기 때문이다.

- 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 심지어 데이비드 헤이그에 따르면 동일한 개체 내에 있는 서로 다른 유전자들(혹은 유전체 요소들) 간에 진화적 이익이 충돌할 때 “유전체 갈등”이 발생합니다. 한 유전자가 선호하는 전략이 다른 유전자의 선호하는 전략과 상충될 수 있다는 겁니다. 대표적인 예시가 ‘유전체 각인’입니다. 특정 유전자가 부모 중 어느 쪽으로부터 유전되었는지에 따라 그 발현 방식이 전혀 달라집니다.


** 물론 일초살이 자아가 마음에 들면 다음 일초살이 자아도 그 친구와 명맥(밈)이 이어지도록 하면 됩니다. 찰나라는 것은 그 자체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한 송이의 들꽃에서 천국을 보고, 한순간에 영원을 담으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도 있지요.




도구가 주인을 부리는 아이러니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도구에 둘러싸여 살아갑니다. 마음, 감정, 언어, 그리고 스마트폰. 이 도구들을 잘 다루지 못하게 되면 우리는 오히려 도구들에 의해 삶과 마음을 착취당하게 됩니다. 뇌와 마음의 작동 방식(모든 경험의 근간이고 삶이라는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장치의 뒷배경)을 익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뇌의 작동 원리, ‘자아와 삶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힘에 휘둘리게 됩니다. 도구를 적절히 다루는 방법을 모르면 우리 자신이 도구가 됩니다.


적응주의자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 좋은 것인가?” DNA? 개체(나)? 사회? 밈? 우리는 단순히 유전자와 밈을 실어나르는 기계가 아닙니다. 우주의 비밀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한 사용자입니다.




파도가 아니라 바다

뇌 속에서 일렁이는 언어의 흐름. 그것은 그냥 작은 파도입니다. 생각, 감정, ‘나’라는 이야기... 모두가 한순간 일어나는 작은 파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파도 하나하나에 목숨 걸고 일희일비하고 있었던 겁니다. 작은 파도 하나가 전부인 줄 알고 거기에 휩쓸리는 ‘나’를 만들어냅니다. 재밌는 건, 그 ‘나’라는 게 사실은 없다는 것입니다. 뇌가 만들어낸 ‘일초살이 자아’고, ‘심부름꾼’일 뿐이라는 겁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無我)와 이어집니다. ‘나’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 그리고 ‘나’라는 것이 없으니, 괴로울 것도 없다. 영어로는 “No self, no problem”입니다. 내가 없으면, 내가 느끼는 그 괴로움도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괴로운 건, 있지도 않은 ‘나’라는 녀석을 너무 진지하게 붙잡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 녀석이 만들어내는 파도와 이야기에 너무 휘둘리지 않고, 파도는 흩어지도록, 이야기는 흘러가게 냅두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파도를 모두 포함한 바다 그 자체이기 때문에 파도 하나하나에 일일이 연연할 필요는 없습니다.


람 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한 번도 함정에 빠진 적이 없다.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이야말로 모든 망상 중에서 가장 큰 망상이다. 모든 영적 수행은 망상에서 탈출하려고 하는 망상가에 의해 창조된 망상이다.”


크리스 나우바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당신은 무대 위의 배우도, 마음이라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이야기도, 당신의 믿음도, 믿음에 대한 믿음도 아니다. 당신은 우울도, 우울해하지 않으려 애씀도 아니다. 우리는 드라마를 볼 때 그것이 드라마라는 사실을 거의 눈치채지 못한다.”


발버둥 치는 나도, 깨달으려고 애쓰는 나도,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부처도 없습니다. 진짜 ‘나’를 어디 가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에 있는 내가 진짜 나입니다. (진짜 나와 가짜 나를 가르는 구분선은 없으며, 모두가 진짜거나 모두가 가짜입니다.) 늘 언제라도 그래왔듯이 나는 여기에서 ‘나’를 하면 됩니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 펼쳐지는, 있는 그대로 완전하고 경이로운 우주적 현상입니다. 모든 것이 옳고 그름 없이 피고 지면서 함께 흘러갑니다.




<묘미>

명상은 참 신기하다

미래로도 가지 않고

과거로도 가지 않고

더 재밌는 것을 찾으러 가거나

다른 누구를 만나러 가지 않고


매번 단 한 번뿐인

지금, 그리고 여기에

명료하게 초점 맞추고

그냥 여기 있는 그대로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며 깨어 있으라니


한 자리에서

어디가지 않고

나의 자리에서

다른 무엇되지 않고


시간축의 앞뒤라는 분별을 넘어

상하좌우 공간을 쪼개지 않고

나의 전생이고 다음 생이고 현재인

무한한 우주와 다시 합일되기


그리고 다시 깨어나서

당신에게서, 주위의 모든 것에서

우주를, 텅 빈 충만을 발견하기

내가 멈추면 우주가 움직이고

내가 움직이면 우주가 멈춰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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