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이 시기에 신선도를 따지시다니요.
봉쇄 초기부터 내게 제일 아쉬웠던 채소, 대파.
드디어 대파를 구했다. 중국요리에서 대파는 한국음식에서 만큼 큰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평소 대파를 쫑쫑 썰어 냉동실 가득 얼려두고 이 요리 저 요리 빠지지 않고 한 줌씩 뿌려대던 나는 대파를 구할 수 없어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대파 대신 그나마 어렵게 구해낸 잔파를 조금씩 사용해 보지만 그 크기 차이만큼이나 맛이 전혀 나질 않는다.
그러던 중 마침 가끔 들르던 집 앞 채소가게에서 대파를 판다는 소식을 듣고 대파를 일곱 뿌리나 사버렸다. 가격은 평소의 꼭 두배라지만 지금 가격을 물을 수도 없다. 사촌지간이라 그런지 역시 구하기 힘들다는 양파까지 일곱 개. 두 가지만 해서 한국돈 15000원을 썼다. 이게 웬 파플렉스인지.
집안 봉쇄의 원칙상 물건을 직접 가지러 가면 안 되지만 대파가 정문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남편을 독촉해서 가져와야 했다. 워낙 향신채를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 누가 가져갈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묵직하게 받아 든 대파의 상태를 보니 썰기도 전에 눈물이 났다. 내가 이런 파를 두 배 값이나 주고 산거야?
상태가 말이 아니다. 초록 이파리 끝은 여기저기 짓눌려 까맣게 썩어가거나 혹은 너무 말라 부스러졌고 흰 기둥은 이미 수분이 빠지기 시작하여 껍질이 일어나고 있다.
조금 망설이다 야채가게 주인에게 상태가 좋지 않다 소식을 전해 보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상냥하게 문장 끝에 애교 섞인 추임새까지 넣던 상냥한 라오반양(老板娘)은 어디 가고 파르르 정색이 가득한 음성 메시지가 답장으로 날아왔다.
“손님, 이 시기에 신선도를 따지시다니요. 저희도 어렵게 구한 겁니다.”
그래. 어제까지만 해도 대파 한 대만 구하면 소원이 없겠다 했잖니. 이러지 말자. 그냥 남아있는 멀쩡한 파에 집중하자.
대륙의 대파답게 거대한 뿌리가 달린 밑동을 쑹덩 잘라내던 중 잠깐, 뿌리는 심으면 파를 키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칼질을 멈춘다. 벌써 파테크를 시작한 집도 많이 있던데. 뿌리에서 한 주먹쯤 위를 잘라내어 남편에게 전해주며 파테크를 요청했다.
나는 파를 썰 테니 당신은 파를 심으시오.
구제가 불가능한 이파리는 손으로 뚝뚝 떼어내고 말라버린 흰 껍질도 벗겨낸다.
이파리를 떼어내니 이미 매운 파 냄새가 주방 가득하다. 냄새가 매운 걸 보니 그래도 안은 싱싱한 상태 그대로 인가 보다. 하지만 이대로는 파를 썰기도 전에 대성통곡을 하게 될 것 같아 플라스틱 보안경을 착용했다. 남은 파를 깨끗이 씻고 먼저 가위로 남아 있는 초록 이파리에서 상한 부분만 최소한으로 오려냈다. 어린 시절 종이 인형의 어깨 걸이 부분을 오려낸 이후 이렇게 조심스럽게 가위질을 한 적이 있었던가. 양파도 상태는 비슷하다. 상한 껍질을 다 벗겨내면 절반은 버려야 할 것 같아 벗겨낸 껍질에서도 먹을 수 있는 부분은 씻어서 다시 통에 넣어두었다. 처음보다 많이 작아진 양파들은 초록 창에서 미리 알아본 대로 하나씩 꽁꽁 랩으로 싸서 지퍼백에 다시 넣어둔다. 이렇게 하면 빨리 상하지 않는다 했으니 당분간은 안심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파를 썰어 지퍼백에 넣어야 한다. 보안경을 썼지만 미처 막지 못한 코에서는 맑은 콧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까딱하면 대파에 떨어져 단맛이 더해질 지경이다. 맹구처럼 옷소매로 스윽 콧물을 닦아 보지만 어이쿠, 잠깐 들썩한 보안경 틈으로 매운 내가 들이쳤는지 이제 눈물도 차오른다. 가만, 파를 입에 물고 파를 썰면 맵지 않다 들었는데, 이것도 따라해보자.
하지만 출렁출렁 눈물에 , 그렁그렁 콧물에 파까지 입에 물고 잘 보이지 않는 파를 썰자니 파를 앙 깨문 입술 양 옆으로는 이제 침도 넘쳐흐른다. 파를 물고 파를 썰면 맵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잘 보이지 않지만 매운 눈을 끔뻑거리며 빠른 속도로 파를 썰어 지퍼백에 담고 비좁은 냉동실에서 테트리스를 해가며 공간을 만들어 보관까지 성공적으로 끝냈다. 아, 드디어 들큼한 파맛이 가득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되었구나. 게다가 좀 맹구스럽긴 했지만 대성통곡 없이 파썰기의 전쟁도 잘 마쳤다.
지난해 방울토마토를 거둬 먹고 남은 흙에 사회적 거리를 두듯 서로 멀찍이 심긴 파뿌리 5개는 말라 버린 흰 껍질 안에서 다행히 초록색 싱싱한 줄기를 힘껏 올렸다. 3층 베란다보다 더 좋은 햇볕과 바람을 받아 그런지 우리 집 대파보다 더 쑥쑥 자라나 내 질투를 받았던 601호 집 대파 두 대는 내 질투 탓인지 어쨌는지 화분을 얹어둔 난간이 무너지며 바닥에 내팽겨쳐져 낮에 예쁘게 찍힌 사진이 그대로 영정사진으로 쓰일 뻔했다. 하지만 다행히 한번 뿌리를 내린 초록색 이파리는 새로운 화분으로 옮겨 심긴 후에도 튼튼히 자라나 언젠가 된장찌개 속 마지막 맛을 완성시켜줄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평소보다 두 배나 되는 가격에, 버려지는 부분이 반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억울해서 또 눈물이 날 것 같지만 엄마가 끓인 찌개 비슷한 맛을 내줄 테니 조미료 값을 냈다고 치자. 그리고 화분을 엎거나 말라 죽이지만 않는다면 잘 키워낸 싱싱한 초록색 대파를 공짜로 먹을 수도 있으니, 따져보면 결국 비슷한 값일 거야.
억지 위로지만 눈물 뚝. 나는 대파를 가진 여자니까.
-22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