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입에 심심할 틈이 있을 수 없다
공구시장도 어느 정도 안정화가 되고, 다행히 단지 내 가게에서도 식재료를 구할 수 있어 배고플 걱정은 없어졌지만, 아무리 다양한 재료를 구해봐도 결국 간장 때문에 까맣거나, 고춧가루 때문에 빨갛거나, 거의 두 가지 맛으로 통일되는 내 요리 솜씨 때문에 뭘 해 먹어도 거기서 거기다. 게다가 내가 만든 밥은 맛이 없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밥은 역시나 남이 해주는 밥인가 보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밥 배 간식 배가 따로 존재하는 것 같은 우리 집 아이들은, 손쉽게 집어먹던 군것질거리들을 구할 수가 없어 죄 없는 냉장고 문만 닫았다 열었다를 반복하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냉장고에는 어렵게 구했지만 이젠 처리해야 할 대상이 된 채소들과 냉동식품만 가득할 뿐, 먹는 순간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과자나 아이스크림, 나이차 奶茶 같은 자극적인 간식은 전혀 없다. 사실 나도 코끝에 닿는 순간 온몸을 해제시켜버리는 고소한 버터향을 품은 페스트리 빵과 짭짤하고 바삭한 오징어 모양 과자가 너무 그립지만 방법이 없었다. 차라리 그 맛들을 몰랐으면 좋으련만. 직접 겪어본 적은 없지만 간식은커녕 배부르게 쌀밥만 먹어도 행복했다던 엄마 아빠 어릴 때의 옛날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아, 그때보다 못한가. 그땐 자유로이 수박 서리라도 했지.
아쉬운 대로 집안의 식재료를 다 털어, 심심한 입을 채워줄 간식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볶은 땅콩>
언제 샀는지도 모른 채 냉장고 한편에서 빨간 속껍질에 주름이 생기도록 늙어버린 생땅콩. 기름 없이 마른 프라이팬에서 탁탁 소리가 날 때까지 볶다가 피부처럼 딱 붙어있던 속껍질이 부르르 부르르 벗겨지는가 싶으면 쟁반에 담고 한 김 식힌다. 너무 센 불에 볶다 보면 프라이팬만 타버릴 수도 있으니(물론,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중불에 천천히, 오래오래 팔이 아프도록 저으며 볶아주면 고소하고 집어먹기 쉬운 훌륭한 간식거리가 된다. 소금을 살짝 뿌려도 짭조름하니 맛나겠지만 건강을 위해 패스했다.
막 볶아 냈을 때 입에 털어 넣으면 남아있는 수분 때문에 눅진한 느낌이 나기도 하고, 무엇보다 뜨거워 혓바닥을 홀라당 델 수도 있으니 조금 시간을 두고 식혀 먹어야 한다.
기름 없이 볶아낸 땅콩은 고소하기도 하고 오독오독 씹는 맛도 재미있는 터라 심심풀이 땅콩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탁 위에 올려둔 땅콩은 오고 가는 식구들의 입으로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 버리고, 거실 여기저기 붉은 땅콩 껍질만 바스러진 채 풀풀 날아다니고 있었다. 얇은 땅콩 껍질은 바닥에 붙으면 떼어내기 쉽지 않아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두 번째 볶은 땅콩은 한참을 식혀 손바닥으로 부비부비 했더니 애쓸 것도 없이 껍질이 홀랑 벗겨졌다. 테이블 주변에 날려진 땅콩 껍질을 치울 일은 줄어들었지만 , 이젠 귀찮은 껍질도 없겠다, 다들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한 움큼씩 집어 와앙 한 입에 털어 넣어버렸는지 어쩃는지 역시 식탁 위에는 또 금방 빈그릇만 덜렁 남았다. 말 그대로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북어채>
잘 마른 북어를 참기름에 달달 볶아 무를 넣고 푹 끓여낸 북엇국은 까맣거나 빨갛지 않으면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영 인기가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 온 귀한 몸이신 북어채 또한 김치냉장고 깊은 곳에 박혀있다가 새로 도착할 구호품을 위해 냉장고를 비워내던 중 발견되었다. 이번 격리기간 동안 마치 고고학 탐사처럼 집안 구석구석에서 화석처럼 발견된 먹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맛있는 건어물을 구해주겠다며 멀리 삼천포 시장까지 출동해 캐리어를 듬뿍 채워주었던 엄마가 알면 깜짝 놀라실 일이다.
북어채를 가위로 손가락 크기로 뭉텅뭉텅 잘라 에어 프라이기에 기름 없이 그대로 구워보았다. 역시 예상대로 바삭바삭하면서도 짭조름한 맛있는 간식거리가 되었다. 입에 넣으니 생선살들이 바삭바삭 과자처럼 과자 같은 식감을 내주어, 생선 싫다는 소리 없이 빠르게 사라진다.
쥐포처럼 들큼하면서도 손이 가요 손이 가게 하는 조미료 맛의 유혹은 없지만 생선살 특유의 꼬릿 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있어 아이들이 오며 가며 집어먹기에도, 마요네즈와 간장에 고추를 조금 썰어 넣은 장을 곁들여 맥주 안주로도 딱이다. 아, 오늘도 맥주를 마셔야 하는 이유가 생겨버렸다.
<감자튀김>
아이들이 좋아하는 맥도널드의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늘 못 마땅했던 나는, 이번 참에 아이들이 적어도 감자튀김은 먹지 않을 수 있어 속으로 잘 되었다 했다.
마침 구호품마다 빠지지 않고 지급된 어린아이 머리통 만한 감자는 전을 부쳐 먹거나 된장국에 듬뿍 넣어 먹고도 냉장고 속 자리만 차지할 뿐 줄지를 않아 이참에 수제 감자튀김을 해보기로 했다. 내 재주로는 매장에서 파는 얇고 기다란 모양을 잘라낼 방법이 없고 껍질을 까기도 귀찮아 “웻지 포테이토”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핑계로 껍질도 까지 않은 큰 감자를 아무렇게나 듬성듬성 썰어 맛소금, 올리브 오일을 조금을 뿌려 에어 프라이기에 튀겼다(에어 프라이기를 미리 사두지 않았음 이 격리기간을 어떻게 보냈을지!).
약간의 기름과 공기의 힘으로 막 튀겨낸 감자튀김은 매장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다. 물론 아이들은 엄마보다 맥도널드 아저씨가 검은 기름에 튀겨주는 냉동 감자가 더 맛나다는 표정인 것 같지만. 그래. 다음에는 그럼 감자를 잠시 얼렸다가, 사용하고 남은 기름에 튀겨볼게. 좀 비슷한 느낌이 나려나.
물론 아무리 심심한 입이라도 모든 천연식품들을 간식으로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상해시 고위 관료가 당근밭을 운영하는 것은 아닌가 합리적인 의심을 품게 할 만큼 구호품마다 빠지지 않고 지급된 당근은 아무리 먹기 좋게 손가락 크기로, 예쁘게 잘라서 내놓아도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결국 양념 가득 돼지 불고기를 볶던 날 고기 세 점에 당근 막대기 한 개라는 협박을 하고서야 겨우 겨우 먹어치울 수 있었다. 생당근은, 나도 별로 먹고 싶지 않았다. 사실 요즘 이가 좋지 않아, 당근을 먹다가 이가 부러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제발, 치아가 생생할 때 많이 먹어둬라, 아이들아.
정말 다행인 것은, 이것 저것 머리를 쥐어짜 낸 홈메이드 간식을 다 이겨버릴 최고의 간식, 라면땅이 있다는 것. 봉투째 손바닥으로 땅땅 두드려 쪼갠 생라면에 라면수프를 흩뿌려 넣고 품에 안고 다니며 먹어대는 통에 라면은 금방 동이 나 버렸다. 라면이 홈메이드 간식이냐고? 원래의 목적은 끼니였으나 끼니 중간을 때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간식이라 할 수 있지. 게다가 봉투를 뜯고 그릇에 담고 수프까지 솔솔 뿌려주는 걸. 아이들이 직접 쉽게 준비할 수도 있으니, 진정 최고의 홈메이드, 셀프 메이드 간식, 라면땅. 라면이 없는 봉쇄 생활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지금도 박스째 라면을 쟁이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