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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정실 Oct 30. 2022

4. 결이 고와야 때가 묻지 않는다

2부. 아버지의 인생 수업 - 고운 말을 써라


얘야,
나무에도 '결'이 있단다
'결'이 고와야 때가 묻지 않는단다
거칠면 때가 묻기 마련이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결'!

그건 바로 '고운 말'을 쓰라는 아버지의 조언이었다.


황금빛 색채가 완연한 가을의 경복궁 길을 걷고 있다. 딸바보였던 아버지의 가장 큰 즐거움은 함께 산책을 하며 사진을 찍고 저녁을 먹는 소소한 나들이였다. 그의 소확행은 내 나이 다섯 살 때부터 마흔을 넘길 때까지 이어졌다. 종로구 원서동이 태어난 집이었던 아버지는 추억이 서린 곳이어서인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경복궁과 비원을 내 집처럼 산책했다. 해가 저물면 약주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송해 선생님도 자주 다녔다는 낙원동의 국밥집에서 1,000원짜리 진한 국물의 소고기국밥과 달랑 깍두기 하나에 소주 반 병을 드셨다. 술을 즐겨하는 아버지의 가을 옷자락엔 항상 술냄새가 달랑달랑 매달려 있었다. 걸음걸음 아버지의 옷자락에서 풍기던 술냄새가 지금은 그립기만 하다. 이리 조용한 아버지가 가끔은 잔소리를 하실 때가 있었다. 누군가 앞에서 팔자걸음을 걸으면

"걸음걸이는 일자로 똑바로 앞을 보고 걸어야 한단다" 라며 팔자걸음은 못 걷게 했고, 어떤 이가 쌍스러운 욕을 입에 걸지게 담으면 "얘야, 말이란 건 주워 담을 수 없는 것이니 곱게 써야 한단다"며 행여 '본 데 없는 자식'이란 소리를 들을까 염려 어린 지적을 했다. 당시 어린 나에게 그의 교육은 조선시대 양반 교육 모양 꼼꼼하고 지루했다.


남자 친구를 사귈 때에도 전라도 사윗감은 썩 내켜하지 않았던 탓에 소개팅을 나가도 서울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는 서울 본토박이 사람이다. 엄마는 전라남도 여수에서도 뱃길로 세 시간은 족히 가야 닿는 '소리도' 사람이다. 반듯한 서울말을 쓰는 아버지에게 엄마는 '입말이 거친 전라도 여자'였다. 전라도 사투리가 원래 욕으로 시작해 욕으로 끝나는 까닭이다. 물론 시간이 흐른 후 아버지는 전라도 사람의 화통하고 책임감 강한 성격을, 특히 구수한 입담을 좋아라 하셨지만 말이다.


신랑은 전라남도 완도에서도 배를 타고 40분은 가야 하는 낙도(落島), '생일도' 태생이다. 가끔 고향 거시기 친구들과 통화를 할 때면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염병할 놈. 디저분 줄 알았어야. 씨벌 놈 월매나 바뿌간디 꼬라지 보기도 힘드냐." 이것은 전라도식 반가운 인사다. "담엔 꼭 내려 와 부러. 말은 잘 헌다. 혀를 뽑아 초장에 찍어불까 육시럴 놈, 반가웠고마" 이것은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말이다. 오장육부가 인사말에 빠져 있으면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지. 지방색이 섞인 사투리는 욕이라고 볼 수 없으니 그것을 차지하고 오늘은 '말'에 대한 사색에 빠져 본다.




요즘 오은영 박사가 진행하는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나 부부를 상담하는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이 인기다. 전국 노래자랑이 온 국민의 노래방이라고 한다면 오은영 박사의 프로그램은 온 국민의 상담소가 되었다.

자녀문제가 되었든 부부 문제가 되었든 오은영 박사의 해결법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소통'이었다. 특히 결혼이 지옥 같다는 부부들의 문제는 '말을 함부로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말은 단순한 소리 기관으로부터 나오는 음성의 결합이 아니다. 상대에게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담고 있는 소리인 것이다.


이기준 작가의 산문집 '언어의 온도'에서도 말하듯 '말'에는 따뜻함과 차가움, 적당한 온기 등 나름의 온도가 있다고 한다. 공감한다. 세상살이에 지칠 때 누군가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50년 지기 친구도 단칼에 남을 만들어 버리는 것 또한 '말' 한마디이다. 


뿐인가. 조선시대의 학자 이덕무의 '선비 집안의 작은 예절'을 다루고 있는 『사소절』, '언어()'편을 보면 

저속한 말이란 한번 입에서 나오면 선비의 품격과 행실을 곧바로 떨어뜨린다. 저속한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말라. 예를 들어 요즘 세상의 경박한 자들이 유학자들을 일컬어 '궤(, 꿇어앉을 궤)'라고 하며 무릎 꿇고 앉은 자세를 조롱하거나 무인()들을 일컬어 '약(, 뛸 약)'이라고 하며 발로 뛰며 활 쏘는 행동을 조롱하는 일 등이 그렇다. 다른 사람을 '이놈' 혹은 '저놈'이라고 하거나 '이 물건' 혹은 '저 물건'이라고 부르지 말고, 아무리 비루하고 천박한 자라고 할지라도 화를 내어 '도적놈'이니 '개돼지'니 '원수 놈'이라고 부르지 말고, 또한 '죽일 놈'이라거나 '왜 죽지 않고 살아 있는가' 하고 나무라서도 안 된다. 일이 뜻한 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화를 벌컥 내며 '나는 죽어야 한다'느니, '저 사람을 죽여야 한다'느니, '하늘이 폭삭 무너져버려야 한다'느니, '나라가 깡그리 망해야 한다'느니, '떠돌며 빌어먹는다'느니 하는 따위의 말을 함부로 내뱉어서는 안 된다.

경솔하고 천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면 재빨리 마음을 짓눌러,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단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해로움이 따르게 될 텐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침묵하라
아니면 침묵보다 더 가치 있는 말을 하라.
쓸데없는 말을 하느니
차라리 진주를 위험한 곳에 던져라.
많은 단어로 적게 말하지 말고
적은 단어로 많은 것을 말하라.
- 탈무드



'부부'라는 관계에서 '자녀'와의 관계에서, '타인'과의 관계에서 좋은 말은 단순히 너와 나의 행복함에 그치지 않는다. 감동적인 말 한마디가 사회 분위기까지 따뜻하게 만드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반면, 관계의 '독'이 되는 비난 하거나 경멸하는 말,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남을 공격하는 말, 이기적으로 담을 쌓는 말, 이러한 말들은 부부나 자녀와의 신뢰관계를 깨게 만든다. 그뿐 아니라, 나쁜 말 중에도 가장 나쁜 익명의 악성 댓글은 누군가 스스로 목숨까지 끊게 만든다.


모든 인생 공부가 그렇듯 언어의 순환도 연습이 필요하다. 혹시 '두더지 게임'을 해 보았는가? 예견치 못한 위치에서 불쑥불쑥 머리를 들이밀며 올라오는 두더지를 냅다 내리치면 점수가 올라가는 게임이다. 혹시 갑자기 가슴이 분탕질되며 '욱'하니 나쁜 말이 올라오면 '두더지'를 잡듯 내리치고 한 숨을 돌려 보는 게 좋다. 1분만 생각을 돌려보아도 '잘 참았다'는 생각이 들 테니까. 품격을 지키며 살아가는 일 중 '말의 품격'을 지키며 살아내는 것이 어찌 이 복잡하고 다사다난한 세상에서 녹녹한 일일까.  


퇴사 후, 거의 끊다시피 했던 술을 한 잔 하고 있다. 기분 좋은 사색을 끝내고 나면 어제보다는 조금 더 나은 내가 되어있는 듯 해 기분 좋은 나만의 축배다. 


아버지의 그 지루하고 꼼꼼했던 인생공부 한 마디를 되새기며 한 잔!






'말'의 중요성을 담고 있는 명언들을 되새겨 본다.

말은 여신처럼 옷을 입고 새처럼 날아올라야 한다 - 티베트

말은 꿀과 침을 동시에 갖고 있는 벌과 같다 - 스위스

악의를 가지고 슬쩍한 말 한마디가 10년 공덕을 허사로 만든다 - 프랑스

혀만큼 치명적인 독은 없다 - 영국

혀는 인간이 갖고 있는 최선의 것인 동시에 최악의 것이다 - 그리스

혀가 미끄러지는 것보다 발을 헛디디는 것이 차라리 낫다 - 아르메니아

셔츠는 다리 사이에 단단히 여미고, 혀는 이 사이에 단단히 여며라 - 폴란드

부드러운 혀는 뼈를 부순다 - 성경

어리석은 자들의 마음은 그들의 입에 있지만 지혜로운 이들의 입은 그들의 마음에 있다 - 성경

말에서 지혜가 말씨에서 교양이 드러난다 - 성경



- 이 글은 아버지가 생전에 딸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하던 말씀을 엮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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