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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영 Oct 29. 2024

천고마비, 가을의 의미

  아침 출근길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독 파랗고 높은 하늘에 진짜 가을이 오긴 왔구나 새삼 느껴졌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질기게도 버티던 여름도 이젠 가을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뺏긴 모양이다. 내년에 다시 올 '여름'이라는 놈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지만, 다시 돌아올 여름을 걱정하기보단 가을을 만끽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가을이 온 걸 눈치챈 순간 어느새 지나가버리니... 

 그런데 아침만 해도 화창하던 하늘이 오후에는 예고에 없던 비를 뿌렸다. 여전히 푸른색에 가까운 나뭇잎들이 가을답게 물들지도 못한 채 떨어져 버리는 건 아닌가 걱정되었다. 

가을을 특별히 좋아하진 않지만, 가을다운 가을은 만끽하고 싶으니까. 


 그럼 내게 가을은 어떤 의미일까?

애절한 추억을 떠올리며 마음 한구석에 바람이 이는 것 같다거나, 적당한 선선함에 마음이 조금 상기되어 괜히 들뜨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다지 낭만적이지 못한 사람인가 보다. 

 슬프게도 내게 가을이라고 하면 가장 떠오르는 게 바로 비염이다.  
 콧물을 훌쩍이며 이비인후과를 친구네 집처럼 들락거리다 보면 어느새 겨울이 지척에 있으니...


 옛사람들에게 가을이라고 하면 아마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게 당연히 '풍요'일 것이다. 먹을 것이 풍부한 수확의 계절이니까. 

 그리고 가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가 바로 '천고마비'이다. 그래서 오늘은 천고마비에 얽힌 이야기를 조금 풀어볼까 한다.



 '천고마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듯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찐다는 뜻이다. 

 당연히 풍요로운 계절이니 말이 살이 찌는 것이겠지만, 이 사자성어가 만들어진 당시의 중국에서 ‘천고마비’는 두려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중국은 고대 은나라 때부터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흉노족이다. 그들은 북아시아 지역에 존속했던 유목민 집단을 가리키는데, 춘추시대 후기에서 전국시대 초기 사이에는 중국이 胡(오랑캐 호)라는 이름으로 부르던 기마 유목민이다.

 흉노족은 유목민족인 까닭에 농사를 짓지 않았다. 그래서 가을이 되면 긴 겨울을 나기 위한 양식을 마련해야 하는데, 주로 중국 국경지역을 침략해 양식을 뺏어가는 것이다.

 말의 먹이가 풍부해진 가을이 되면, 적당하게 살이 올라 힘이 세진 말을 타고 본격적으로 중국 국경 지역을 침략해서 식량을 약탈해 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가을이 온다는 것은 풍요로운 계절의 시작임과 동시에 흉노족의 약탈이 시작되는 시기가 온다는 뜻도 되는 것이다.

 가장 풍요로운 계절을 마음껏 누리지 못하다니……. 

그리고 보면 나라나 민족, 또는 사람마다 어떤 대상을 향하는 감정이 가지각색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와닿는다.

  해마다 돌아오는 가을이라는 계절이 나에게는 비염이라는 부끄러울 정도로 메마른 의미로 다가오지만, 어떤 이에게는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게 할 수도, 어떤 이에게는 아픔을 연상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이 글을 쓰는 오늘이 2년 전 이태원 참사가 있던 날과 겹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하루, 그러니까 '10월 29일의 가을'만큼은 수많은 것들을 연상시키는 ‘가을’이 아니라  ‘아픔’을 기억하고, '추모의 마음'을 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마도 예고 없이 내렸던 비는 우리에게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잊히는 법이고, 이렇게 쉽게 잊혀서는 안 되는 일이니까.

 

 마지막으로 작은 바람을 가져본다. 

  ‘가을’이라는 단어가 앞으로 더 이상 그 누구에게도 또 다른 ‘아픔’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 나는 때때로 어떤 글을 쓰다가, 생각이란 놈이 마구잡이로 나를 다른 방향으로 데려갈 때가 있다. 아마도 오늘이 그런 날이었던 듯싶다. 본래 '천고마비'에서 시작해 진나라가 망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인 '호(胡)'에 대한 얘기로 나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오늘은 기억해야 할 10월 29일이었기에, 이쯤에서 마무리하려고 한다. 못다 한 진나라의 얘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天高馬肥(하늘 천, 높을 고, 말 마, 살찔 비) :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가을을 가리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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