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짜교사 이야기
수업이 끝나기 5분 정도 남은 시간. 2분 정도 짜리 관련 영상을 시청했다. 영상이 끝나고 설명을 덧붙이는 사이, 한 학생이 수학 문제집을 풀기 시작했다. 학생에게 다가가 수학 문제집을 손수 덮어서 교탁으로 가져왔다. 당장은 수업 중이니 끝나고 대화를 나눌 참이었다.
"하.. 왜 가져가."
"뭐라고? 왜 가져가냐고?"
"하... 아니, 그게 아니구요..."
"종 치고 잠깐만 얘기하자."
너그럽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때로는 칭찬으로 들리기도 하고, 때로는 비꼬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어떤 상황에서 버럭 화를 내고 아이를 궁지로 몰아 붙인 후 벌점을 주며 지도한 선생님이, 똑같은 상황에서 내가 아이와 몇 마디 대화를 해서 상황을 마무리하는 모습을 본 후에 덧붙이는 이 말은 분명 비꼬는 말로 들린다.
"선생님은 어쩜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어?"
발령 첫 해, 아이와 세상 끝까지 갈 것처럼 언성을 높인 적이 있었다. 아이가 전학 보내달라며 악다구니하는 모양새가 너무도 속상하고 기가 막힌 나머지 나도 덩달아 악을 썼다. 지금 뭐하냐며, 가고 싶으면 알아서 가라고, 지금껏 내가 나 좋으라고 너랑 승강이하며 지도해 온 줄 아냐며. 내 마지막 자존심으로, 욕설만큼은 입에 담지 않았지만 아이에게 결코 지지 않겠다는 일념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는 것을 절대 숨기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별 거 아니었다, 상습 흡연. 그 당시 나는 '나는 너를 반드시 옳은 길(그 당시에는 무조건 그것이 옳은 길이라 믿었다)로 인도하리라'는, 같지도 않은 사명감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일로, 같은 학생과 두어 차례 악다구니를 쓰다가 결국 나는 무너져 내렸다. 아이가 집에 가겠다며 뛰쳐나가고서야 정신이 났다. 난 대체 무얼 위해 악을 쓰고 있었던가. 과연 아이를 바르게 키우고 싶었던 것이었나. 아니, 싸우다 보니 그저 이기고 싶었던 건 아닐까.
교무실에서 나와 학교 건물 그늘진 구석에 가서 혼자 펑펑 울었다. 아이를 바른 길로 이끌지 못했다는 자괴감? 아니, 패배감이었다. 아이를 이겨 먹고 싶었던 나 스스로에게 져 버린 순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 학생과의 문제는 전혀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지 않았고, 감정만 상해 서로 거리감만 커져버리고 말았다. 다시는 흡연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아, 난 비슷한 상황이 닥쳐 올까 싶으면 그 상황을 외면하기 바빴다. 쓰린 감정을 회피하게만 된 나. 철저한 나의 패배였다.
그게 시작이었다. 학생들의 문제 상황을 앞에 두고 격한 감정에 휩싸이지 말 것, 객관화된 시선으로 상황을 보려 노력할 것, 실망이나 노여움의 감정을 안지 않은 채로 대할 것 등을 스스로 되뇌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나는 웬만한 사건들 앞에서 학생들과 목청 높여 소리 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처음엔 많이 불안했다. 때로는 힘의 논리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모습을 보이는 경향의 학생들이, 나를 약자로 판단하고 거칠게 행동하면 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까봐 두렵기도 했다.
다행히도 곧 내 불안감은 줄어 들었다. 나의 차분한 대응에, 점차 아이들도 적응하는 것 같았다. 때때로 학생들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거센 목소리와 움직임으로 분출하려 폼을 잡았다가, 내가 흥분한 학생의 수준에 맞게 붙어주지 않으니(?) 김이 빠진 것처럼 금세 사그라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후 나는 학생이 자신의 감정을 살핀 후 먼저 표현하게 하고 교사인 내 감정이 어떠한지 인식시킨 후, 대화를 나누다 보면 곧 큰 소리 낼 일 없이 상황이 정리되는 것을 느꼈다. 막상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 말이 안 통하는 학생들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교사에게 차분하게 전달해 보는 경험이 없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순식간에 격앙된 목소리로 소리치는 것만이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는 아니었을까. 방어 기제라고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물론 학생과 대화하는 순간에,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 내 감정의 전부는 아니었다. 겉으로는 차분하고, 조리 있고, 논리적으로 대화를 이끌고자 노력하지만 속으론, '어쩜 저렇게 밉게 행동할 수 있을까', '왜 이리 말을 거칠게 하는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사과를 받고 싶어 애쓰고 있을까.' 등등의 정리되지 못한 복잡한 감정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많았다. 내가 느낀 감정은 시간을 흘려 보내며 내가 추슬러야 하는 것이니, 학생에게 그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화중에는 웬만큼 이런 감정을 끌어올리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학생과의 대화가 끝나고 죄송하다는 말을 한 마디 듣게 되거나 학생이 조금 달라진 행동을 보게 되면 사르르 녹을 감정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나의 방법이 곧 그들의 행동 개선으로 직접적으로 나타났는지는 제대로 확인할 바 없지만, 좋은 점은 꽤 있다. 분노, 슬픔, 좌절과 같은 격한 감정 소모가 없다는 것, 대립 과정에서 불필요한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줄어들었다는 것, 그 덕에 애써 쌓아온 신뢰와 관계를 무너뜨릴 일이 별로 없다는 것. 차분한 대화 이후 학생과 묘한 친밀감(미운 정?)이 생겨, 더 진지하게 유심히 지켜보게 된다는 것.
이렇게 몇 년을 지내 온 내게 심심치 않게 들리는 '너그럽다'는 말. 처음에는 그 말의 의도가 참 많이 신경이 쓰였다. '너는 학생을 제대로 지도할 생각이 없구나. 너는 학생한테 무시나 당하는구나.' 능력과 의지가 부족하다는 뉘앙스로 느껴져 욱하고 나쁜 기분이 솟구치기도 했다.
하지만 노력하려고 한다. 노력하고 있다. 그 말이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누구나 나름의 대처 방법이 있고, 그 방법에 따라 학생들과 관계를 맺어 나가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학생들과 목청 높여 부딪치는 것만이 대수가 아님을 하루하루 느끼며 만들어 온 나의 방식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서. 수학 공부를 하다가 반말로 왜 가져가냐 묻던 학생은 어떻게 되었는가? 수업이 끝나고 교무실에서 학생과 마주 앉았다. 그에게 책을 바로 돌려주고, 내 의도는 학생을 화나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음을, 수업 중에만 맡아두었다가 돌려주려 했음을, 내 수업이 수학 문제 풀이에 밀려버려 속상했음을 차분히 말하고 사과를 받았다. 내게 문제집 압수를 당하는 줄 알고 화를 내었다는 학생의 말을 듣고, 내가 학생이 오해하게 만들었다는 데에 대한 미안함을 전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다시는 그 학생이 수업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모습을 못 보았다는 훈훈한 결말.
그래서 오늘도 나는 '모든 경우가 이랬으면 좋겠다' 혼자 생각하며 너그러운 교사 행세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