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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에 빠지다

샤인 머스캣

by 소봉 이숙진

크리스마스이브에 과일 바구니를 선물 받았다.

조간을 주우려고 현관문을 열었다가 커다란 상자가 리본을 달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 예능 방송처럼 사람이 들어있나 의심할 정도로 큰 상자다.

무거워 꿈쩍도 안 하니, 그 자리에서 언박싱할 수밖에 없다.

비싸서 늘 한 박자 쉬고 장바구니에 집어넣던 샤인 머스캣이 맨 위에서 연두 같은 웃음 날리니 반갑기 짝이 없다.

애플 망고와 태국망고, 제주 밀감 레드향, 천혜향, 파파야, 사과, 단감이 골고루 두 개씩 들었다.

한 개씩 든 파인애플과 샤인 머스캣과 배, 아보카도, 메로골드, 석류를 빼고 두 개 짜리는 하나씩 갈라서 언니네 몫으로 보냈다.

그중 샤인 머스캣은 한 봉이 워낙 크니까 반으로 갈라서 보냈다.


제일 먼저 샤인 머스캣을 식초에 담가서 씻어내고 단숨에 반 봉지를 먹어치웠다.

포도계의 귀족, 포도계의 명품, 포도계의 샤넬이라는 별칭이 붙은 샤인 머스캣은 씨가 없고 과육이 탱글탱글하여 톡톡 터지는 식감이 좋고 당도가 아주 높다.

알이 거봉보다 굵으니 한 입에 넣기는 버겁다.


다음으론 어릴 때 많이 먹었던 단감을 깎았다. 역시 선물용이라 당도가 최고다. 여태 먹어 본 단감 중 최상의 맛이다. 과일 바구니로 인하여 크리스마스이브가 아주 풍성하다.


과일바구니1.png 선물 온 과일 바구니


이튿날 산책 나가자고 언니에게 전화를 했더니, 목소리가 콱 잠겨서 힘이 하나도 없다.

왜 무슨 일이냐니까, 샤인 머스캣과 단감에 급체해서 밤새 Over eat 했다고 한다.

"에고, 쯧쯧! 먹을 복도 저렇게도 없을까? "

샤인 머스캣과 감을 먹은 지 오래되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고 하는데, 포도가 알이 굵어서 덜 씹고 넘어가버린 모양이다.

언니는 장이 유착된 기저질환이 있어서 이 포도는 네 입 정도로 나누어서 먹어야 하는데, 순간 본인 상태를 망각한 것이다.

연휴에 문을 연 약국을 찾아서 약을 지어다 먹고 물만 마시고 있다고 하며 전화도 겨우 받는다.

하필이면 어제 또 닭개장도 한 통 주었으니 세 개 중 어떤 녀석이 범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두 내가 준 것이니 죄인은 나다.

닭개장이 맛있어서 한 대접 다 먹었다고 할 때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근데, 이 경우엔 음식을 준 사람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건지 참으로 얼쯤하다.


내 거 주고 뺨 맞는다고, 괜스레 안절부절못하고 묘하게 찜찜하고 걱정스럽다.

늘 잔병치레를 하던 언니가 요즘 매일 만 보 걷기를 하여 얼굴에 살이 포동 하게 오르더니, 또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파인애플과 애플망고를 숙성시켰다가 같이 먹으려고 실온에 보관해 보지만, 열대 과일이 그녀에게 괜찮을지 모르겠다. 빨리 완쾌하여 이 미안한 마음과 걱정을 불식시키고 본토 과일이라도 같이 맛있게 먹었으면 마음이 조금 가볍겠다.

내일은 야채죽을 쒀서 가 볼까 하다가도, 내가 또 음식을 줘도 될까 망설여진다.

내 음식과 궁합이 안 맞는 것 같아서다.

이 거리두기 시점에 문병을 가야 옳은 일인지 심각한 딜레마에 빠지는 하루다.


과일바구니.jpg 실온에 숙성 중인 파인애플과 애플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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