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엽편 1 07화

내가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은

by 빈자루

1.

처음 말을 배웠을 때가 언제이더라. 내가 말을 먼저 배웠던 것일까. 글을 먼저 배웠던 것일까. 아무래도 사물을 먼저 배웠던 거겠지.



2.

그래, 처음 써놓은 글을 보고 즐거워했던 건 언제였을까. 내가 아주 어린 아이일 때였을까. 엄마한테 글을 배우며 칭찬을 받던 때였겠지. 아마 그랬을 거야. 한 글자 한 글자 엄마가 가르쳐 주는 그것을 종이 위에 마구잡이로 그어 놓으면 엄마가 좋아하고 아마 그랬겠지. 나는 아마 그게 너무 좋았을 거야. 나는 그게 글인지도 몰랐겠지만. 아마도.

나는 그게 그냥 장난인 줄 알았을 거야. 아마도.



3.

종이 위에 빽빽한 글씨들을 보고 겁을 먹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랬었던가. 읽어야 할 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겁을 먹은 적이 있었던가. 아니. 나는 그랬던 적은 없는 것 같아. 내가 아주 어릴 때에는. 나는 글을 읽는 행위가 위대하다고 생각했었지. 책 속에는 나무꾼들도 있고 슈퍼맨들도 있고 다 있었으니까. 나는 책이 위대하다고 생각했었어. 책이. 아니. 친구들이. 아마도. 친구들이 그 속에 아주 아주 많이 들어있었지. 나는 늘 궁금했었어. 책이랑 텔레비전 속에는 태권브이도, 철이도 있는데 왜 나에게만 그것들이 없는지에 대해서. 나는 그게 아주 궁금했었어. 아주 오래 걸려 그것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말이야. 그래도 나는 글을 좋아했었지. 빨려드는 것 같았으니까. 엄마가 좋아해서 그랬었을까. 아빠가 좋아해서 그랬었을까. 나는 글이 좋았어. 글을 읽는 행위가 나를 위대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으니까.



4.

처음.

니가 글을 쓰자고 했을 때 나는 매우 놀랐지. 니가 내게 다가와 같이 문집을 내보자고 했었어. 나는 그냥.

그냥. 머리를 빡빡 밀고 책상 앞에 앉아 책만 보던 범생이였는데 말이야. 나는 너의 그 제안에 마음이 너무나 흔들렸었지. 니가 왜 나에게 먼저 다가와 그런 말을 건냈던 걸까. 내가 하루키나 쿤데라의 소설을 읽는 모습을 보고 니가 말을 걸었던 걸까. 나에게 정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는 건가. 너의 초대를 받은 녀석들은 금방 으쓱해졌었지. 그렇지 못한 녀석들 중에 몇은 속이 쓰렸을테고.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나는 으쓱.

금방이라도 하루키나 쿤데라 같은 소설을 마구마구 쏟아낼 수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 니가 내게 다가와 글이 얼마나 진행됐냐고 물을 때마다 난 니가 선생님보다 더 짜증났지. 나는 공부도 해야 했는데 말이야. 너는 자꾸만 꾼 돈 받으러 오는 사람처럼 니가 초대했던 13인에게 돌아다니며 글을 구걸했어. 그때 너는 무슨 생각으로 고3 따위가 문집 따위를 내자고 그랬던 걸까.

너도 기억이 나겠지. 비상이었어. 우리는 이름을 비상이라고 지었지. 그게 문집 제목이었나. 아님 문학회 이름이었나. 아니. 이름을 정해놓고 가져왔던 건 너였어. 비상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에 모두들 놀라 아연실색했었지. 설마 정말로 비상이라고 우리의 위대한 문집 이름을 정하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우리는 살짝 너를 의심했어. 그런데 정말 비상이라고 문지 앞장에 찍혀서 책이 출판됐더군. 나는 그 이름을 파버리고 싶었지. 그 한하디 흔해빠진 그 이름 비상. 그것도 이유를 알 수 없게 한문 고딕체로 찍혀있던 그 이름. 왜 한문을 썼는지 왜 비상이어야만 하는지 묻는 우리들 질문에 너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던가. 그게 멋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던가. 13인의 발기인을 대표해서 너는 니 마음대로 이름을 정할 자격이 있었던 건가. 그랬을 테지.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그때도 생각했었을 거야. 아무도.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문학 동아리 비스무리한 걸.

생각해 냈던 사람은 바로 너였으니까.

그 넓고. 아니 그 좁고. 아니 그 넓고 많은. 친구들. 그 친구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소설을 내라 시를 내라 닦달을 하며 돌아다녔던 것도 너였으니까. 이름이 촌스러워도 너에겐 그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어. 지내놓고 보면 그것도 다 의미 있는 추억이 될 거라 생각했지. 정말로 그렇게 되었고. 우리는 사진을 찍었지. 13인의 발기인. 정말로 우리는 발기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다 함께 교복 위에 파카를 껴입고 손을 호호 불며 학교 정자에 모여 사진을 박고 그 사진을 문지 앞면에 실었으니까. 기억이나. 그랬었다는 것이. 아직도.

나는 왜 소설을 쓰겠다고 했었던 걸까. 소설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고 그걸 안다는 사람도 아직 하나 만난 적이 없는데, 그 어린 나이에 무엇을 알고 무엇을 원해서 소설을 쓰겠다고 지껄였던 것일까. 아님 선택했던 것일까. 소설.

소설이 좋았지.

시보다.

재미있었으니까. 아니 그때 시는 교과서에 실리는 문제 지문 정도로만 생각을 했었지. 그래서 시는 재미없는 거라고 생각을 했어. 짧고. 간단하게. 금방 쓸 수 있는. 그런. 시 같은. 것보다는.

길고. 어려운. 재미도 있는. 그런 게. 소설이라고 생각을 했었지. 아마 그랬지. 그래. 그래서 나는 소설을 쓰겠다고 했던 것 같아. 아마 그랬던 것 같아. 수필은. 뭔가 생경한. 알 수 없는 어른 느낌이 나는 거. 소설은 뭔가 하루키나 어떤 어릴 때 읽었던 그런 공상 만화책 같은 느낌일 거라. 그때. 그렇게 생각을 했었지. 아마 그랬을 거야.

그래서 소설을 좋아했었어. 이야기. 죽 펼쳐지고 들어가고 흥미가 진진한 그런 이야기. 그게 소설이라고 생각을 했었어. 그러니까 그래서 소설을 쓰겠다고 했었던 것 같아. 약간의 오기. 분량을 최대한 길게 늘여 쓰겠다는 그래. 맞아. 그런 애송이 같은 오기들을 다들 가지고 있었지. 소설을 쓴다던 놈이 시를 한 두 개. 억지로 더 써서 낸 녀석도 있었고. 소설에 수필에 시에 우리는 잡탕이었어. 잡탕처럼 우리는 억지로 분량을 늘려서 문집의 두께를 최대한 두껍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어. 그랬었을 수밖에. 우리는. 바빴고. 어쨌든 공부는 해야 했고. 선생님의 눈치도 보며. 글을 써야 했었으니까. 그랬었지.

긴 글을 쓰는 녀석일수록 위대한 녀석이라고 생각을 했었지. 긴 글을 쓴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아예 처음부터 몰랐던 때니까. 그랬던 것 같아.



5.

처음.

친구들이 냈던 글을 읽었을 때 난 놀라자빠질뻔했었지. 난 솔직히 많이 놀랐었어. 그. 그림. 그림자. 라니. 그런 간단한 단어로 어떻게 시를 만들었지? 난 그게 많이 놀라웠어. 프린터기에 지 얼굴을 박고 그 출력된 모양을 지가 쓴 소설 중간에 그대로 집어넣었던 녀석. 무슨 말도 안 되는 비트겐슈타인 어쩌구를 흉내 낸 문단 몇 마디를 적어 낸 녀석. 나는 그 놈들과 살고 있었지. 그때는. 그랬었었지. 그리고. 그 놈들 말고도 친구들이 엄청나게 많았었지. 그 넓고. 좁고. 아니 넓었던 교실 안에는.

그래서 결국엔, 정말로, 그.

문집이라는 게 나오긴 나왔더라. 다들 각자 한마디 씩 문집 맨 앞 장에 하고 싶은 말을 적기로 했을 땐 정말 신기했어.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냥 내 소설의 제목을 적었던 것 같아. 나의 첫 번째 소설. 그게 내가 처음 썼던 소설의 제목이었지.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아. 무슨 난로가 나오고 여자가 나오고 커다란 손이 나왔던 것 같은데 그것 말고는 기억이 나지 않아. 그래서,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생각해도 그때 그 제목을 지었던 건 정말 잘한 짓이었던 것 같아. 뭐, 어느 정신병자의 일기니, 그 여름의 여행이니 하는 그런 식의 제목이 아니라 말이야. 그냥 첫 번째로 쓴 소설이니까 나의 첫 번째 소설. 그 제목은 평생가도 잊지 못할 그런 것이 되었지.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야.

나의 첫 번째 소설.

우리들의 첫 번째 문집. 그리고 그 문집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그리고 성표.

성표. 성표.

성표.

성표가 어느 날 불쑥 그렇게 죽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지. 우린 고작 열여덜이거나 스무 살이었던 때였으니까. 누군가가. 그것도 우리 친구가 죽는다는 걸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성표는 죽었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성표가 우리 후배들의 문집에 소설을 완성해서 올릴 수 있을 줄 알았어. 비상 2. 우리 후배들의 문집 이름이었지. 비상 1에 완성하지 못하고 어이없게도 (다음번에 계속)이라는 문장으로 끝났던 성표의 소설. 어떤 여름에 어떤 남자들이랑 여자들이랑 어디를 놀러 가서 뭔가를 할 것처럼 시늉만 하다 그냥 끝나버렸던 성표의 소설. 너는 왜 연애소설 나부랭이를 가져왔니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하며 보는 둥 마는 둥 했던 성표의 소설. 차라리. (다음번에 계속)이라는 어이없는 끝맺음이 가장 인상 깊었던 성표의 소설. 평소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성표. 그리고 성표의 죽음. 그리고 13인의 발기인. 하나가 빠져 결국에 12인이 되어 버린 발기인들.

그리고 비상 2에서도 완성되지 못했던 성표의 소설.

그래서 더는 완성될 수 없게 됐던 성표의 소설.

몰랐었지. 그때는. 우리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이제는 그런 거에 어느 정도는 익숙해진 것 같은데. 그런데 말이야. 그럴 나이가 우리가 되어 가고 있는 건가. 그런 건가.



6.

글이란. 뭘까.



7.

그냥 나는, 뭔가 굉장히 서툴렀던 것 같아. 하고 싶은 말을 하는데 말이야.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지껄여도 생각처럼 그게 나오질 않고 나온 말이라는 게 마음에 그렇게 들지도 않고, 누가 뭐를 물어보면 그걸 굳이 대답해야 하나 싶고 그랬어. 그래서 나는 그냥 원래 닥치고 있는 놈이었거든. 말하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어. 귀찮고, 무의미하다고 생각을 했었지.

걸핏하면 지 말이 맞다 내 말이 맞다 떠들어대기나 하는 인간들. 번지르르하게 말을 할 자신도 없었고 뭘 말해야 할지 당최 입을 떼려고 하면 생각이 나질 않는 거야. 그런데 달랐어. 글은. 글을 쓰면 뭔가 내가 몰랐던 것들이 튀어나와서 종이 위에 기록되었지. 나는 그게 좋았어. 그걸 쓰는 게 나를 위대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어. 그랬던 것 같아. 그래서 계속 자꾸만 글을 쓰려고 노력을 했었고. 주구장창 글을 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글을 쓸거라 생각은 했었지. 어디서든.

싸이월드든 프리첼이든 어디다 대든 손가락으로 떠들면 신나게 떠들 자신이 있었지. 말하는 거랑은 다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그렇게. 고칠 수도 있고. 그렇게. 똥인지 된장인지 모르게 입으로 무슨 말이 나가나 알지도 못하고 떠들지도 않을 수 있고 말이야. 나는 그래서 글을 쓰고 싶었던 것 같아. 아마 그랬던 것 같아. 그거 말고는 뭔가.

나를.

표현한다는 게 너무나 어색하고 자신이 없었어.

대게는

방명록에 글을 남기거나 문자를 하거나 직접 사람을 만나지는 않고 그런 시간을 쭉 즐겨왔던 것 같아.

그랬었지. 그랬었던 것 같아.



8.

나는 대학에 와서는 검도를 했어. 지긋지긋했던 공부는 이제 안 해도 되니 하고 싶은데로 막살겠다고 결심을 했었지. 그리고 그건 너무 좋았어.



9.

너는 알고 싶은 게 더 있다고 말하고는 나와 다른 대학을 가서 연극을 하고 철학을 공부하고 경제를 공부하더니 결국에는 어느 날 편집쟁이가 되어 있더라. 나는 그냥 검도 밖에 할 줄 모르는 바보가 되었는데 말이야.

그랬는데 그 짓도 이제 신물이 나더군. 뭐든 좋은 건 처음 한 순간뿐이야. 지긋지긋하게 소리나 지르고 몽둥이로 다른 놈 두들겨 패는 것 따위. 이제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아. 그래도 기합을 지를 때는 기분이 죽여줬었는데 말이야.

그냥 글을. 언젠가는 쓰겠지 늘 생각은 했었어. 늘 준비되어 있고 너는 지금 뭘 어떻게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상한 문장들을 죄다 갖다 붙여서 이상한 상을 타고 이상한 출판사에 들어가고 내가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내뱉는 인간이 되었지만 나도 언젠가는 너랑 비스무리하게 그치에 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었지. 은근히 말이야.

그래서 처음 너에게 글을 배우러 다니겠다고 했을 때 니가 했던 말 기억하니?

-넌 이제 늦었으니까 그냥 와이프한테나 잘하고 아빠 되기 수업이나 들으라고.

나는 그 말이 별로 기분 나쁘진 않았어. 사실 나도 되게 고민을 많이 했거든.

추상적인 거. 글 같은 거 말이야. 세상에 글자 나부랭이가 너무 많이 널려있다는 걸 나도 어느샌가 깨달아버리게 되었거든. 뭔가를 잡으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잡히지도 않고 돈 나부랭이 같은 거 되지도 않는 그 딴 거에 빠지게 될까 봐 나도 겁이 났었어. 간신히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아내를 사랑하는 남자가 되어 구체적인 것들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다시 추상적인 세계로 날아가 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거든. 바스락바스락. 귓가에 울리는 종이 소리가 너무 많다고 생각했어. 그전에는. 필요 없는 글들이 너무 많고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듯이 믿을 수 있는 글들이 얼마 없다는 걸 스무 살 넘은 시절에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거든. 거짓말쟁이들.

그 세계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아내를 만나고. 세상에서 가장 구체적인 여자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갖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리고 아내와 이야기하고 아내와 소풍을 가고 아내와 커피를 마시고 아내와 잡담을 나누고 내가 아내에게 우스갯소리를 하고 아내가 웃고 그럼 나는 또 신나서 아내 앞에서 춤이라도 출 듯 까불고. 아내는 나에게 구체적인 사람이었지. 나는 그런 아내가 좋았고. 내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인터넷 검색 같은.


10. 어느 순간 미친 듯이 또 글을 쓰고 있더군.

다시는 추상적인 세계에 빠지지 말자고 결심을 했었는데 나는 또 어느새 미친 듯이 이 짓에 열을 올리고 있더군.

빌어먹을 책들을 사고 읽지도 않고 책장에 열심히 꽂아놓고 좋은 글을 읽으면 흥분을 해서 잠을 설치고 왔다 갔다 하다가도 또 어떤 좋은 글들은 겁이 나서 꺼내어 눈에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빌어먹을 어느 순간에 다시 또 반복이 되려 하고 있었어. 그래서 겁이 났지. 이대로 괜찮은가. 이대로 또 저기 멀리 빙하나 사막 같은 데로 멀리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난 그게 겁이 났었어. 그래도 글을 꽤 잘 썼어.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어떤 날은 없던 것이 막 두세 개씩 생기고 막 그랬지. 정말 금세. 처음엔 잘 나오지도 않던 그런 게. 자고 일어나면 막 생겨있고 그랬지. 그걸 또 막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친구가 뭐라고 하나 그걸 또 막 불안해하며 기다리고 누가 글을 써오면 누가 더 잘 썼나 불안해하고 기다리기도 하고 말이야. 미친 짓이었지. 글쓰기라는 건. 역시 미친 짓이었어. 너의 말이 맞았어. 그랬었지. 그랬던 것 같아. 머릿속이 타들어 가듯이 너무 아프고 신경이 쓰이니까 말이야. 이게 재능이라고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지. 이딴 건 개나 줘버리라고 저주라고 낙인이라고 병신표시라고 생각했던 적이 더 많았었지만.

글이 막 말라버리더라.

쓰다가 쓰다가 자꾸 쓰고 보여주고 읽고 하다 보니 더는 글을 쓰기 싫어지더라. 평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다가 이제는 평가를. 평가를 다시 하려고 하고 있어. 그 지긋지긋했던 평가. 너는 잘하고 나는 못났네 이 글은 좋은 글이고 저 글은 나쁜 글이네 글이 잘 안 나오네 이러고 평가를 다시 하려고 해 내가. 그놈의 지긋지긋했던 평가. 그딴 건 평중 평가단이 가져가하라고 해. 그 빌어먹을 망할 놈의 평가 그딴 개 같은 평가 사람 병신 만들어 놓는 평가 그 거지 같은 평가 그 더러운 평가 그 지랄 맞은 평가 인간 다 말아먹을 평가 그 병신 같은 평가를 말이야 평가를. 내가.

내가 내 글에 대고 평가를 해. 그 빌어먹을 평가를. 이거는 이래서 안 된다 저거는 저래서 안된다. 이러고 내가 평가를 이 지랄을 하고 있어 그 지긋지긋한 평가를 그 지랄을 다시 하려고 하고 있어 어느 순간 그 빌어먹을 것이 다시 머릿속에 들어오려고 하고 있어 그 빌어먹을 평가 이 사람은 이래서 좋은 사람 이 사람은 이래서 좋은 팀장 저 사람은 이래서 나쁜 직원 저 사람은 이래야 하고 저 사람은 저래야 하고 편을 가르고 싸우고 헐뜯고 계획하고 자르고 평가하고 팀을 가르고 아래로 내리고 내가 올라가려고 하고 내가 다시 또 그 지랄을 하려고 하고 있어 어느 순간에.



11.

위대한 인간 따위 같은 게 있는 걸까.



12.

그 따위게 있다고 아무것도 모를 때는 생각을 했었지.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냥 다 똑같은 병신들만 지구에 모여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 그게.

아주 오래전 일은 아니고.

아주 얼마 전의 일이야. 니미 인간은 그냥 다 똥 싸고 밥 쳐 먹고 기집질이나 하고 다 그러는 인간들 뿐이더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말이야. 그걸 모르고.

여태 속고 살았었는데 또 기대를 하게 되고 내가 뭘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게 되고 계획을 하고 편을 가르고 또 뭔가를 바꾸려 하고 뭔가를 해결하려 하고 뭔가를 알아내려 하고 누군가를 내편으로 만들려고 하고 누군가한테 칭찬을 들으려고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인기 있으려고 하고 잘하려고 하고.

잘하려고 하고.

그 지랄 맞은 그놈의 잘하려고 니미. 어차피 세상은 똥덩어리였는데 그걸 간신히 알아차리고는 이제 와서 그걸 또 까먹게 되었더라고 어느 순간에 말이야.

나는 그냥 얘기를 하고 싶었거든.

그게 뭐가 됐든 간에 우리가 뭔가 안 되는 건 소통의 문제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해서 풀어내자. 내가 내 글로 뭔가를 바꿀 수 있겠다고 생각을 했어.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을 했었지. 아니. 최소한. 이 짓을 하는 게 즐거울 거라고 생각을 했어.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하니 너의 말이 맞았어. 글 따위. 애초에 아무것도 모르는 게 나은 거였어. 아내와 직장. 그리고 태어날 아기. 그게 내게 가장 중요한 거였지. 엄한데 신경을 쓰지 않고 최소한 아내와 직장. 그리고 태어날 아기는 지킬 수 있을 테니까. 구체적으로 살면. 뭔가를 해결하려고 안에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몸을 움직이고 돈을 벌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영화 보고 자면. 그러면 적어도 뭔가를 해내기 위해 혼자 골머리를 썩고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야. 글이라는 건 무서워. 특히. 소설. 다른 건 모르겠고. 어떻게 써야 할지를 모르니까. 발단 전개 절정 결말 이 지랄. 인물이 몇 명 이상은 들어가야 하고 갈등 구조는 왜 들어가야 하고 소설이 원하는 건 이런 거다 지향해야 할 방향은 이런 거다 소설로는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 이런 걱정 같은 건 죄다 집어치워버려도 되고 말이야. 그래도.

뭔가. 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는 그런 글들을 써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나랑 비슷한 사람들이 이렇게 많구나 하고 느낄 수 있는 그런 글들을 말이야. 그랬는데 그 짓도 틀린 것 같네. 또 뭔가를 해내려고 하고 계획을 하고 걱정을 하는 버릇이 들어버렸으니 또 계속 고집을 피우다 큰일이 나기 전에 적당한 선에서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지.


13. 그래서 넌 요즘 어떻게 지내니? 와이프랑은 재미가 좋고?



14. 난 요즘 사실 좀 별로란다.



15. 왜냐하면 다들 그렇듯이 뭐 먹고사는 문제 때문이지. 결국에 나는 이 글을 완성하지 못할 것 같아. 글을 완성하고 싶은데 아기도 봐야 하고 직장에도 다녀야 하고 사정이 좀 여의치 않네.



16. 아마 그동안 너무 무리해서 그랬던 것 같아. 잠시 좀 쉬면 이제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어.



17. 혹시 또 모르지. 회사가 사회가 좀 살기 넉넉해지면 다시 뭔가를 쓸 여유가 생길지도 말이야.

어쨌든 결국에 다시 또 쓰고 싶어질 날이 올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그때까지는 좀 쉬려고 해.

너무 무리를 해왔어.

무리라는 거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닌데 말이야.

글을 쓰기 시작하고 나서 너에게 가장 먼저 말을 하고 싶었다. 사실.

너한테 내가 쓴 글을 탁 던져주고 카페에서 그 지긋지긋했던 추상적인 얘기 이자가 없는 세상이며 이상한 나라의 앨비스며 돌고래다리클럽이며 뭐 그 딴 것들.

그런 추상적이고 말로 어떻게 표현이 안 되는 그런 이상한 이야기들을 너와 나누며 지금과는 다른

카페에서 달콤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그런 한가하고 햇살 따뜻한 오후를

그래도 나는 기대하고 있었단다.

그 멍청한 비상이며

너의 말도 안 되던 대학 시절 이야기며

지금은 다들 잊고 자기 살기 바빠 생각이나 할지 모를 성표 이야기며

나는 그런 이야기를 너와 함께 그냥

나누고 싶었던 것뿐이란다.

너는 지금 어디니?


18.

그래서 내가 이 기록을 남기는 것은 언젠가 이 기록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로 기록되고 그 기록을 출력해서 너에게 건네주고

네가 그 기록을 카페 테라스에서 담배 피우며 죽죽 읽는 동안 나도 옆에서 너의 반응을 초조해하며 기다리고

네가 아무 말도 없이 종이 장을 넘기고 끝내 다 읽고 났을 때 너와 나의 생각을 얘기하고 나는 그걸 또 기록하고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그 이야기를 다시 너에게 보여주고 나는 다시 너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또 너의 이야기를 듣고 너도 내 이야기를 듣고 또 그러다 보면 뭔가

그래 그때

그 비좁았던 아니 넓었던 교실 한켠에 빡빡머리 사내아이들이 가득하여 정액 냄새를 풍기며 학습지를 펴던 그때

그때에 땀을 뻘뻘 흘리며 우리 학교 최초로 문학 동아리를 만들겠다고 다들 기대감에 부풀어하던 그때에

아직 정해진 것보다 정해지지 않은 것이 많아 더 설레었던 그때에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모르고 살며 그냥 하루키나 뭐 그 따위 것에 빠져 살던 그때에

우리가 지금처럼 갈라져있다고 느끼지 않고 늘 붙어 있다고 느껴왔던 그때에

누군가가 죽어버리고 이렇게 크게 되면

글이라는 게 지겹고 무섭고 힘든 것이라는 걸 알기 전의 그때에

그래서 바로 그때에

그때에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하고 아직까지도 나는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때까지

너.


너.


너.


내 친구들아. 부디 건강하게 있어다오. 너희들과 다시 만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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