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독서실로 가기 위해서는 술집이 늘어선 좁은 골목을 죽 따라 들어가야 했다. 초겨울 날씨에 몸이 좀 차긴 했지만 그래도 새로운 곳으로 간다고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후드티의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어깨에 매달린 무거운 팩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리곤 어느 영화에서 봤던 중세 시대 사제의 대사가 떠올라 혼자 속으로 속삭였다. 형제님. 참회만이 살길입니다. 나는 가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한다. 아마 홍두가 있었다면 같이 키득거리면서 맞장구를 쳤을 거다. 도란나. 니, 고마해라.
홍두에게 전화를 걸까 하다 그러지 않기로 했다.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하고 모드를 진동으로 바꿨다가 다시 무음으로 돌려놓았다.
홍두와 나는 대학 신입생 OT 때 처음 만났었다. 나는 신입생 환영회라고 다들 처음 보는 사람들끼리 알은척을 하는 게 어색해서 혼자 멀리 떨어져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홍두가 먼저 다가와서 나한테 말을 걸었다.
“니 언제부터 담배 핐노?”
“고1”
사실은 수능이 끝난 후부터였다.
"니 촌에서 왔나?"
"응."
나는 홍두에게 담배 피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니 이거 할 수 있나?”
홍두가 담배 끄트머리를 집어 자기 입 쪽으로 휙 던지더니, 그 끝을 잽싸게 물어 챘다. 그러고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연기를 뿜었다. 내가 담배 피우는 법을 홍두에게 가르쳐 주었지만, 나중에는 홍두가 나보다 담배를 더 잘 피웠다.
“우예 하노?”
내가 담배 끝을 입 쪽으로 휙 던졌다가 볼에 맞고 떨어지자 그에게 물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을 때는 그의 사투리를 따라 했다.
“이래 해 바라, 이래.”
홍두가 담배를 새로 하나 꺼내서 자기 입에 다시 휙 하고 던졌다. 홍두는 담배를 피우다가 침을 많이 뱉었지만, 가래침은 아니었다. 입술을 쭉 내밀어서 라이터 불꽃의 밑 둥을 빨아들이는 것도 홍두가 가르쳐줬다. 홍두는 좋은 친구였다.
우리는 별로 싸울 일은 없었지만, 딱 한 번 그가 내게 크게 화를 낸 적이 있었다.
“니도 내 무시하나?”
홍두가 가방을 집어던지며 내 어깨를 세게 밀치며 말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홍두가 말하길, 아까 강의실 앞에서 내가 홍두에게 담배를 빌렸고, 홍두는 자기가 물고 있던 담배를 내게 주었었다고 했다. 그런데 내가 그 담배를 입에 물면서 “이 새끼 침 졸라 묻히네.”라며 큰 소리로 웃었다는 것이었다. 그때 자기가 좋아하는 일 년 위의 여자 선배가 주위에 있었는데, 내가 떠드는 걸 듣고 자기를 빤히 쳐다봤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미안해졌다. 그래서 나는 그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줄도 몰랐고, 그녀가 주위에 있는 걸 알았었더라면 절대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을 거라며 사과했다. 그리고 내 행동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스스로가 미울 지경이라고도 말했다.
“니 진심이가?”
홍두가 볼이 빨개져서 내게 재차 물었다.
"응."
나는 그에게 대답했고, 그는 오히려 자기가 심했던 것 같다며 되려 내게 미안해했다. 그러면서 같은 반의 키 큰 서울 놈들이 자기가 지나가는데, 지들끼리 뒤에서 홍두를 가리키며 빨간 돼지, 빨간 돼지, 라며 키득거렸었다고 했다.
"씨발놈들이네."
내가 그들을 욕했고 홍두의 표정이 편안하게 펴지더니 그 새끼들은 진짜 나쁜 새끼들이라며 나와 함께 욕을 했다. 나는 홍두의 그런 점이 좋았다. 뭐가 좋았냐 하면 적어도 홍두는 뒤에서 다른 말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화가 나면 화가 났다고 툴툴거렸고, 미안한 마음이 들면 금방 미안하다고 또 사과를 했다. 나는 그게 홍두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홍두를 좋아했다.
술집 반대편에서 낯익은 얼굴 하나가 이쪽으로 걸어오길래, 아는 사람인가 싶어 우산을 내려 얼굴을 가렸다. 이런 데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절대 싫다.
얼마 전 학교에 갔다가 같은 과 후배 녀석을 만났는데, 그놈은 진작에 시험에 붙고 고시반 실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원래 학교를 졸업한 지 좀 지나서 웬만하면 학교 쪽으로 잘 가지를 않았다) 걔가 신입일 때 내가 걔 앞에서 엄청 후까시를 잡았었는데, 지금은 걔는 시험에 붙어서 여자애들한테 인기도 많고 옷도 잘 입고 다니는데, 나는 걔보다 나이도 훨씬 많으면서 시험에 붙을 자신도 없고 옷도 맨날 추리닝이나 후드티만 입었다.
그 고시반에서 주관하는 모의고사를 쳤었는데, 채점한 시험지를 돌려받기 위해서는 재수 없게 그 녀석을 꼭 마주쳐야만 했다. 놈이 단상에 올라가서 왕자님처럼 사람들 이름을 부르면 호명된 사람이 앞으로 나가서 단상에 널브러진 자기 시험지를 찾아 돌아가야 했다. 녀석이 나한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지만, 왠지 그 녀석을 마주하고 싶진 않았다.
ㅇㅇㅇ. 빌어먹을. 개새끼가 쌀쌀맞게도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주섬주섬 단상 앞으로 나가 그 아래 죽 널려있는 시험지들을 뒤지는데, 망할 내 시험지가 보이 지를 않는 거다. 문제를 풀면서 뭔 말인질 하나도 모르겠어서 죄도 삼번으로 쭉 밀고 나왔는데, 그 망할 시험지가 도대체 보이 지를 않는 거다. 그런데 하필. 하필이면 그게 딱 그 새끼 발 아래 깔려 있는 거다. 나는 땀을 질질 흘리며 놈의 발밑에서 간신히 내 시험지를 찾았다. 빨간 사선이 죄다 그어져 있었고 놈은 여전히 왕자님처럼 사람들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가려는데, 놈이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그리곤 형 열심히 하세요, 라며 나를 격려했다. 빌어먹을. 그날 이후로 나는 학교에는 근처도 안갔다. 상처를 받는 사람 입장에선, 상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무조건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그게 빌어먹을 약한 인간들이 가진 숙명이다.
공부를 접고 취직 준비를 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 하지만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왜 그 고생을 하고 그만두느냐, 니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떨어진 거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들이 지멋대로 떠들어댈 게 뻔했다. 심층 이니 압박이니 하는 그 놈의 면접들은 또 어떻고. 면접관 놈들은 지가 외과 의사라도 된 양 내 머릿속을 파헤치려들 게 뻔했다.
놈들이 내 뇌를 해부하려는 앞에선 울음을 터뜨리거나 비겁하게 변명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랬다간 놈들이 나를 붙여주지 않을 테니까. 놈들은 그냥 눈앞에 있는 상대를 쿡쿡 찔러보는 거다. 그러곤 이 사람이 정말 실패를 극복했는지 아님 아직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는지 판단을 하겠지. 도대체 그게 왜 중요한 건지는 모르겠다. 어차피 덜 떨어지고 게을러서 떨어진 거는 그게 그거일 텐데.
서른이 넘어 뭔가에 실패한다는 건 인생이 그냥 골로 가버리는 거다. 특히나 요즘 같은 고스펙 시대엔 태어나서 성공만 빼곡히 하며 살아온 인간들이 수두룩하다. 단 한 번이라도 실패하면 그 인간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는 거다. 그러면 영영 그 무리에 다시 속할 수가 없다. 어딜가나 실패한 기억이 내 머리를 짓누르겠지. 그러니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거다.
추리닝 차림의 남자와 여자 무리가 재잘거리며 독서실 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그 속에 입을 벌리고 게걸스럽게 떠드는 덩치 큰 뚱땡이가 보였다. 내가 처음 이 동네에서 학원을 다닐 때부터 봤던 인간이었다. 놈을 보자 마음이 조금 놓였다. 놈이 인사를 할까 봐 후드를 눈썹 아래로 내렸다.
우산을 털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이 어깨가 아팠다. 짐을 옮기면서 이것저것 죄다 챙겨 와 독서대 귀퉁이가 튀어나올 만큼 가방이 불룩했다. 벽에 기대 가방을 밀치고 엘리베이터가 오길 기다렸다. 배가 아프고 발이 시렸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분홍색 더플코트와 양털 후리스를 입은 여자 두 명과 우비를 입은 배달부 하나가 나보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배달부의 검은 우비 자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더플코트와 양털 후리스는 그와 멀찍이 떨어져 둘이서만 속닥대고 있었다. 어쩐지 이번 독서실에서는 뭔가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아무 데서도 연락이 없었다. 핸드폰을 진동 모드로 바꾸었다가 다시 무음으로 돌려놓았다.
덜컹.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문에 몸이 끼었다. 문이 다시 열리는 순간, 잽싸게 안으로 들어가 섰다. 후리스가 분홍색의 귀에다 대고 속닥대자 분홍색이 킥킥거리며 웃었다. 나는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천천히 숨을 골라 쉬었다. 신발 밑창이 젖어 양말 밑이 축축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배달부가 8층에서 내렸다. 뚝뚝 우비에서 물을 다 흘리는 바람에 엘리베이터 안이 물바다가 됐다. 그에게서 물이 묻지 않게 몸을 돌려서 벽에 바싹 붙어 섰다.
다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분홍색과 후리스가 다시 한번 킥킥댔다. 나는 폰을 뺐다 다시 집어넣었다. 배가 다시 살살 아팠다. 엘리베이터도 도착할 때까지 벽에 붙은 껌 자국을 바라봤다. 누가 언제 저걸 붙여놨는지 때가 타서 검게 변한 자국이 지워지지도 않고 버튼 장식 옆에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독서실이 있는 층에서 섰다. 후리스와 분홍색이 내리고 나도 그들을 따라 내렸다.
“안녕하세요.”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모습의 총무가 후리스와 분홍색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그의 앞에 서 있자 귀찮다는 듯 이어폰을 빼며 무슨 일로 온 거냐고 물었다. 나는 새로 독서실을 다니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자리 있나 보구요. 총무가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나는 그가 귀하디 귀하신 입을 다시 열 때까지 그의 앞에서 기다려야 했다. 가방이 무거워 일 초라도 빨리 벗어놓고 싶었다. 벽 쪽에 하나 있어요. 나는 그에게 알겠다고 말했다. 그가 나에게 공부한 기간, 나이, 사는 곳, 나온 학교, 준비 중인 시험 등 쓸데없는 것들을 가득 적으라며 종이 쪼가리를 하나 디밀었다. 이게 뭐라고 쓴 거예요?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글자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얼른 그 숫자를 지우고 그 위에 다른 숫자를 다시 적었다.
총무가 자리를 안내해 주겠다며 나를 따라오라고 했다. 복도에 물자국이 묻지 않게 조심조심하면서 그를 따라갔다. 그가 종종거리며 내 앞을 걷는데, 뒷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큼지막한 엉덩이를 씰룩거리면서 걷는데 바지가 자꾸만 흘러내렸다. 한 발자국 거를 때마다 그가 바지를 추켜 올리는데 당장 내가 나가서 벨트라도 사주고 싶었다.
총무들은 대개 그런 식이다. 이 인간들은 아주 화려하지도, 아주 촌스럽지도 않은 종류의 뿔테 안경을 쓴다. 머리는 꼭 한 뺨 정도로 자르고 그 위에 왁스를 바르고 독서실에 나온다. 그리고 바지는 아무거나 주워 입는다. 놈들은 독서실 여자들이 자기에게 관심이 있다고 착각하는데 그래서 책상 위로 보이는 상체에는 꼭 신경을 쓴다. 놈들은 지가 연예인인 줄 안다. 그래 봤자 상체만 연예인이면서.
하지만 생각해 보면 돈을 아끼기 위해 비누도 갈고 화장지도 갈면서 공부를 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기도 하다. 나는 나이 먹고도 용돈 받아서 독서실에 다니는데. 물론 모든 총무가 다 위대한 건 아니지만.
열람실 안에는 역시 꼬랑내가 진동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좁은 데다 창문도 없으니 당연했다. 뜨끈한 바닥에 양말에 묻은 물을 묻히며 총무의 뒤를 따랐다. 자리 왼쪽 벽엔 외풍이 심했다. 벽에 손을 대자 축축한 냉기가 올라왔다. 열람실 구석구석에는 주인 없는 가방과 도시락통, 심지어는 축구화와 농구공까지 굴러다니고 있었다.
총무가 지목한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어깨가 날아갈 것처럼 가벼웠다. 짐을 내리다가 쿵 소리가 나자 옆자리의 군인 머리가 움찔 놀랬다. 본 체도 안 하고 허리를 빳빳하게 세우고 책만 보더니, 미친 싸이코 새끼.
자리에 앉아서 일단 의자부터 넣었다 빼 보았다. 공부하는 자식들은 미친놈처럼 예민하다. 의자를 조금이라도 끌거나 볼펜을 조금만 따각거려도 미친놈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포스트잇으로 도배질을 해놓는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샤프 딸깍거리지 말아 주세요. 집중이 안 돼요.' 같은 경고장을 받으면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이 쓰이고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나중에는 숨 쉬는 소리까지 거슬리게 된다. 그 망할 경고장 때문이다.
찌걱.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힐 때 조금 소리가 났다. 심각한 건가, 하고 다시 여러 번 의자를 앞뒤로 흔들었다. 찌겅찌겅. 군인 머리가 다시 움찔했다. 가볍게 그에게 목례를 했는데, 놈이 본 척도 안 하고 다시 정면을 바라봤다. 재수 없어. 총무한테 바꿔 달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그러지 않기로 했다.
가방 속의 책을 책상 위에 있는 사물함으로 하나씩 옮기다가 자물쇠를 안 가져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시생 놈들 중엔 도둑놈들이 더럽게 많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책을 훔치고 노트를 훔치고 나중에는 지우개 똥까지 훔쳐갈 놈들이다. 도둑놈들 때문에 잠시라도 자리를 비울 땐 꼭 사물함을 자물쇠로 채워놔야 했다.
갑자기 다급한 마음이 들어서 자물쇠를 사기 위해 열람실을 나왔다. 복도를 따라서 걷다가 다시 열람실로 들어가서 가방에 책과 독서대를 다시 부리고선 가방을 짊어지고 나왔다. 현관 밖에서 우산을 챙기려는데, 망할. 어떤 도둑놈이 벌써 내 우산을 훔쳐갔다. 아무 우산이나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가 층마다 멈췄다. 일일이 닫힘 버튼을 열다섯 번씩은 눌러야 했다.
좁은 골목에 우산을 쓴 사람들이 촘촘했다. 우산살과 우산살이 부딪치면서 물이 튀었다. 사람들이 나를 흘겨봤다.
딸랑.
앞에 보이는 점원에게 물었다.
“열세 자리 있나요?”
“사천 육백 원이요.”
“열세 자리 있나요?”
“봉지 필요하세요?”
놈이 내 쪽을 보지도 않고 앞에 있는 노인에게 지껄였다. 나는 어정쩡하게 노인과 점원 사이에 서서 노인이 잡다한 식료품이며 칫솔 따위를 계산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노인이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는 데 십 년도 더 걸리는 것 같았다. 느린 손으로 천천히 카드를 건네고 천천히 카드를 돌려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봉지를 건네받고선 느릿느릿 계산대에서 떨어졌다.
'이봐. 늙은이. 당장 필요한 걸 챙겨서 여길 떠나. 안 그러면 몸에 바람구멍이 날 테니까.'
후드티 앞주머니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 총처럼 불룩 튀어나오게 하곤 속으로 생각했다.
'니 도란나. 손꾸락 뿌라진대.'
홍두가 있었으면 이렇게 받아 줬을 거다. 어차피 홍두는 없지만.
"뭐 필요하세요?"
"자물쇠요. 열세 자리."
"저쪽에 있어요."
점원이 편의점 뒤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점원이 가리킨 곳으로 어깨를 좁히며 걸어가 바닥부터 천장까지 진열대를 뒤져봐도 자물쇠는 없었다. 생리대며, 고무장갑, 스타킹, 양말, 화투까지 다 있는데 자물쇠는 없었다.
"여기 없는데요?"
점원 쪽을 향해 크게 외쳤다.
"거기 말고 그 뒤쪽이요!"
진작에 제대로 알려줄 것이지. 엉덩이가 바닥에 붙도록 허리를 낮추고 반대편 진열대를 뒤졌다.
"없어요!"
"그럼 없는 거예요!"
어떤 알바들은 더럽게 친절하다. 대부분의 알바들은 더럽게 불친절하지만.
우산을 가게에 꽂아 둔 체 가게를 나왔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비를 맞으며 독서실로 돌아갔다.
로비에 들어서자 겨드랑이와 등에 땀이 솟아서 축축했다. 총무가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무표정하게 고개를 들어 나를 봤다가 다시 무표정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복도를 지나다 분홍색 더플코트를 마주쳤다. 고개를 꾸벅했는데, 분홍색의 표정이 굳더니 조용히 내 옆을 지나갔다. 열람실 문고리를 돌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빽빽하게 앉아있는 사람들 틈을 지나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았는데 이마에 땀이 미친 듯이 솟구쳤다. 땀이 책상 위에 뚝뚝 떨어져서 도저히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노트를 꺼내서 책에 있는 글자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머리통에서 자꾸만 땀이 흘렀다. 후드를 당겨서 코를 속으로 넣어보니 썩은 내가 진동을 했다. 의자에서 다시 일어나자 군인 머리가 움찔했다.
화장실 앞에는 추리닝 차림의 남자와 여자 무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떠들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들이 몸을 옴짝거려 길을 터주었다. 나는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 화장실 문을 당겼다. 어깨를 돌려 좁게 열린 문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다.
세면대에 물을 틀고선 귓바퀴와 이마를 문질렀다. 더운 김이 올라오며 거울에 습기가 찼다. 뿌예진 거울 면을 손바닥으로 쓱쓱 문질렀다.
'니 옥상으로 따라 온나.'
거울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거울 속의 마른 남자가 입술을 비틀 듯이 웃었다. 나는 찬물을 세계 틀어 마른 얼굴을 향해 물을 끼얹었다. 남자가 사라졌다.
수건이랑 화장지가 없어서 웃옷을 까뒤집어 얼굴에 물기를 닦아냈다. 문을 빼꼼히 열고서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소란하던 웃음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남자와 여자 무리가 주춤주춤 몸을 엉키며 지나갈 자리를 내주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다시 총무를 지나고 복도를 지나 열람실로 돌아왔다. 좁은 자리를 지나고 군인 머리를 지나 내 자리로 돌아왔다. 군인 머리가 다시 꿈틀댔다.
자리에 앉아 노트가 한 권 한 권 모두 있는지를 신중하게 세어보았다. 모두 다 그대로였다.
이제 정말 공부를 시작해야지 하고 제일 쉬워 보이는 책을 골라 앞장을 폈다.
그런데 아까부터 지우개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신경이 쓰였다. 필통을 열어보고 사물함에 올렸던 책을 죄다 열어봐도 지우개가 보이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지우개가 군인 머리 발치에 떨어져 있는 게 보였다. 다시 일어서서 지우개를 주울까 하다가 군인 머리가 또 발작을 할 것 같아서 나중에 군인이 밖으로 나가면 주워야지 하고 다시 책으로 돌아왔다. 쉬운 부분이었는데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사물함에 올려진 두꺼운 책들을 빼내 후루룩 책장을 넘겨보았다. 노트를 하나 꺼내 처음부터 다시 정리를 시작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군인 머리가 나갈 것 같지 않아서 지우개부터 찾아와야 할 것 같았다.
내가 자꾸만 자기 쪽을 두리번거리니까 군인이 내 쪽으로 얼굴을 향하더니 단호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미안하다는 티를 냈다.
군인이 다시 책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지우개부터 찾아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한 손으로 책상을 잡은 채 몸을 최대한 뒤로 뻗었다.
캉.
의자가 뒤로 밀리면서 책상 밑으로 처박혔다. 나는 뒤로 자빠지며 바닥에 쓰러졌다. 무표정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쪽을 향했다. 얼른 일어나 의자를 바로 세우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군인 머리가 소리 나게 의자를 쭉 빼더니 한숨을 크게 쉬고 밖으로 나갔다. 자리에 앉아서 그에게 쫓아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까 하다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제일 얇은 책을 꺼내 놓았다.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으니까 적혀 있는 대로 하나씩 노트에 옮기기로 했다. 조금 적다가 도저히 이대로는 다 옮길 수 없을 것 같았다.
왜 이러지. 일단 계획부터 다시 세워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노트를 다시 펼쳤다. 예전에 썼던 공부 계획이나 정리한 내용을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죽으면 죽었지 비겁하게 도망가거나 변명하지는 말자. 이건 누가 쓴 거지? 마구 갈겨쓴 글자가 눈 속에 들어왔다.
나는 도저히 더는 앉아있을 수가 없어서 노트를 덮고 열람실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