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고향에 내려갔더니 한 해 농사걷이가 바빴다. 고추는 애저녁에 뿌리째 뽑혀 있었고 이번엔 김장용 배추, 무 수확이 한창이었다. 엄마는 큰집 밭 두 골을 빌려다 김장무를 심어두었다. 날이 더 추워지기 전에 무를 얼른 뽑아다 김장용으로 쓰고 나머지는 겨울 내내 저장해 두고 먹어야 한다.
나는 아부지를 따라 리어카를 끌고서 마을 어귀 밭으로 향했다. 어릴 적 부모님이 짓던 밭농사량에 비하면 요새 부모님이 짓는 건 농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무가 심어진 사이즈를 보아하니 무를 뽑고 나르기까지 한 시간도 채 안 걸리지 싶었다.
밭에 물기가 없어서 무가 쑥숙 잘도 뽑혔다. 환상의 팀워크를 자랑하며 아부지가 무를 뽑아 놓으면 나는 녀석들을 집어다 들고서 리어카에다 차곡차곡 쌓았다. 등산화가 든든하니 발목을 잡아주어 나는 밭고랑 사이사이를 번개처럼 뛰어다닐 수 있었다.
무를 두 리어카로 나누어 집 마당으로 날라다 쟁였다. 그 사이 엄마는 칼을 들고서 무청을 쓱 베어가며 다듬고 있었다. 그걸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나는 이내 칼을 넘겨받았다. 땅에 묻어 둔 장독에다 무를 저장하기 바쁜 엄마를 대신해 이번엔 내가 마당 한편에 쭈그리고 앉아 무청을 베어냈다.
"산아, 너무 마이(많이) 베어내뿌면(베어내면) 무꾸(무)가 오래 안 간다. 여내(금방) 상해뿌래(상해버린다)."
어라? 내가 무청을 너무 많이 베어냈나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잘라낸 무청에 무 속살이 많이도 붙어 있었다. 엄마가 일러준 말씀을 유념하며 너무 많이 잘라내지 않도록 조심조심 무청을 베어냈다.
이번엔 너무 얇게 잘라내버려 지네끼리 붙어있어야 할 무청 이파리들이 조각조각 흩날리듯 떨어지고 있었다. 이것도 아니었다. 역시나 엄마의 말씀이 이어진다.
"너무 적게 잘라내면 여내(이내) 싹이 나뿐다(나 버린다)."
무청을 너무 얕게 잘라내면 무 위에 파란색이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면 여기서 잎이 돋아나 버려 또 무를 오래 두고 먹을 수가 없단다. 그러니까 무청을 너무 깊게 베어내도 안 되고 너무 얕게 베어내도 안 되는 법이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무청 하나 잘라내는 데 이렇게 깊은 뜻이 숨어 있었다니. 나는 중용이라는 보편타당한 삶의 원리가 심지어 무청 자르는데도 어김없이 작동하는 것에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칼질을 이어갔다.
"엄마! 요만큼 잘라내면 돼요?"
삶의 지혜로 똘똘 뭉친 엄마에게 나는 이 만큼이 중용일까, 저만큼이 중용일까 거듭거듭 검사를 맡아가며 무청 자르기에 열중 또 열중했다. 중용을 배워 바로 바로 실천하기에 참 좋은 가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