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커선 Jul 02. 2020

청량사 바람에 워낭소리가 실려오네

워낭 소리가 기억나는 곳, 청량사

“소가 죽으이께네 안 됐재, 생각이 나니껴?”

“그라먼 안 됐재 뭐. 사람이나 짐승이나 뭐 죽어서깐지 말할 꺼 머 있노”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의 첫 장면
청량사  야외 법당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

할머니, 할아버지 두 노인이 가파른 절 계단을 오르고 있습니다. 절벽 위에 세워진 야외 법당에서 두 노인이 절을 올립니다. 흡사 외국어처럼 들리는 억센 경북 사투리로 죽은 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다큐멘터리 영화 워낭소리의 첫 장면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워낭소리는 2009년 개봉해 독립영화로 무려 300만에 육박하는 관객을 모았던 작품입니다. 시골 촌부는 왼쪽 다리를 못 쓰지만 산에 가서 소를 먹일 꼴을 베어 오고 새벽부터 가마 솥에 불을 떼 쇠죽을 쑵니다. 소에게 해로울까봐 논이고 밭이고 농약은 일절 치지 않습니다. 소의 평균 수명은 열다섯살이라는데 마흔 살이나 된 소는 비쩍 말라있지만 할아버지가 부리면 느릿느릿 기어코 고된 농사일을 해 냅니다.

40년지기 소가 세상을 떠나고 할아버지는 소를 그리워합니다. 그림 같은 야외법당에서 두 노인이 절을 올리던 곳, 영화 초반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아름다운 사찰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청량사입니다.

주인공 할아버지와 소 그리고 소가 차던 워낭

오랜만에 청량사를 찾았네요. 이보다 청량한 느낌을 주는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청량사는 사시사철 언제 찾아도 청량, 청량합니다. 청량하다는 말 보다 좀 더 참신한 용어를 찾아내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 별일곱 사이다 청량음료 광고를 여기서 찍는다면 제대로일 거라고 매번 생각합니다.


소금강(작은 금강산)이라는 별명이 붙은 사시사철 다른 모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청량산은 무척이나 뾰족하고 가파른 열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깊은 산중, 해발 870m 연화봉 중턱에 청량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청량사는 7세기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집니다. 14세기에 중창되었으니 그야말로 천년고찰이네요. 이런 깊은 산중에서 2001년 산사음악회를 열어서 히트를 쳤지요. 이후 산사음악회란 콘셉트가 유행이 되었습니다. 사실 청량산은 퇴계 이황 선생님과 인연이 깊습니다. 청량산은 비록 도립공원이지만 퇴계 선생님의 권 씨 부인이 시집올 때 가져온 사유지입니다. 지금도 퇴계 선생님 후손 소유라고 하네요. 청량산에서 도산서원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여기 봉화-청량산 버스시간표입니다. 안동에서도 시내버스가 다닙니다.

봉화읍에서 청량산행 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립니다. 여기서 약 10분 정도만 걸으면 청량사로 향하는 일주문이 나옵니다. 같이 올라가 보실래요?

청량사 일주문입니다


청량사는 그야말로 산사라 절로 향하는 길의 경사가 장난이 아닙니다. 그래도 1km 정도밖에 안 되니 쉬엄쉬엄 올라가면 괜찮습니다. 길옆 계곡으로 물이 찰찰찰찰 흐르고 울창한 나무가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매미가 시원하게 울어주니 한여름에도 더위 느낄 일은 없습니다. 가는 길에 소원 돌무더기를 보면 찡긋 웃어줍니다. 다만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니 구부래지지(구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청량사로 향하는 길은 경사가 심하지만 심심할 겨를이 없습니다


쉬엄쉬엄 놀며 놀며 30분쯤 걸었을까요? 드디어 절에 도착했습니다. 맨 처음 채송화 꽃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릴 적 엄마가 담벼락 따라 채송화를 심어놓았었는데 나보다 작은 게 땅바닥에 알록달록 붙어 있어 참 귀여웠더랬지요. 오랜만에 찾은 청량사가 이제는 아기자기한 이미지인가 봅니다.

동자승 표정은 보기만 해도 평온해져서 닮고 싶습니다


참 청량사에는 바람도 소리를 만나 머물고 가는 찻집이 있습니다. 오미자차가 상큼하니 달달했던 기억이 나네요.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탁 트인 풍광도 멋집니다. 구름도 한 무릎 쉬었다 갑니다.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안심해서 안심당

워낭소리 배경이 된 영화답게 워낭 모양 열쇠고리를 팔고 있습니다.


 영화 '워낭소리'의 할아버지는 어릴 적 침을 잘못 맞아서 왼쪽다리 힘줄이 오그라졌다고 합니다. 고장난 다리로 힘겹게 올라가던 가파른 나무 계단은 이제 네모반듯 잘 깎은 돌 계단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로 향하는 계단을 보니 세월이 흘렀다는 게 새삼 느껴집니다


제가 청량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야외 법당입니다. 청량사하면 이곳을 빼놓을 수 없지요. 사방팔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또 탁 트여 있습니다. 두 손을 가슴 앞에 합장하고 절을 공손히 올린 뒤 방석에 앉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절에서 절을 한다는 건 밖에 있는 대상을 향해 무릎 꿇는 게 아니라 스스로 하심(下心)하는 거라고요. 땅 위에 우뚝 서 있는 사지와 몸뚱이를 땅바닥에 자꾸 내려놓다 보면 마음도 어느새 내려와 앉습니다. 오랜만에 절을 올리며 마음을 잘 내려놓고 있나 어쨌나 점검을 해 봅니다. 그러고 보니 우즈베크에 살 때 매일 새벽 108배를 하며 목디스크 증상과 무릎 통증을 고쳤던 기억이 나네요. 게을러지지 말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만성 통증이 사라지다니 참 신기한 경험이었습니다. 절하기는 몸과 마음 모두에 득이 되는 약인가 봅니다.

저는 왼쪽 방석이 좋습니다

명상을 하려고 방석 위에 앉았는데 구름이 걷히니까 햇살이 너무 뜨겁습니다. 원래는 파리처럼 햇볕을 쫓아 다녔는데 요즘은 자꾸만 두통이 생겨서 피하고 있습니다. 얼른 소나무 그늘로 후퇴해 다시 명상 자세를 잡고 앉았습니다. 눈을 감으니 풍경이 바람에 흔들리며 짤랑짤랑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바람이 쉭쉭 귀를 스쳐갑니다. 얼마 뒤 눈을 떠보니 초록색 병풍처럼 둘러쳐진 깊은 산봉우리가 앞에 한가득입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좋지만 그러면 풍경이 아까워서 자꾸 눈을 뜨고 싶어집니다.

조용히 앉아서 머리를 비웁니다


청량사 경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녀 봅니다. 스님들이 이 시각 수행에 전념 중이시네요.

스님들은 왜 흰 고무신을 신고 다니실까요? 언제 한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는 약수를 손으로 받아다 양껏 마셨습니다. 이제 내려간다고 위장에 보내는 신호입니다. 사실 삼십 분 전부터 배가 고파왔습니다. 평소라면 염치 불고하고 절밥 좀 얻어먹을 텐데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외지에서 온 저는 마스크를 쓰고 몸을 삼가는 게 맞겠지요. 올라올 때 쉬엄쉬엄 30분 걸렸던 길이 내려갈 땐 10분이면 됩니다. 배고픔이 원동력이죠. 막 뛰어 내려갔습니다. 다행히 구부래지진 않았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산은 청량산이고 제일 좋아하는 사찰은 청량사입니다. 청량사 바람에 워낭소리가 실려오니 오랜만에 영화 워낭소리도 다시 보려고 합니다. 장마비가 갠 오늘 하루 청량한 청량사를 찾아 몸도 마음도 가든하게 하고 돌아왔습니다. 아직 한 번도 안 가보셨다면 꼭 한 번 가보시길 추천합니다. 가 본 사람들만 안다는 '아 이래서 청량사 청량사 하는구나' 싶어지실 겁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