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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gabond Mar 26. 2023

죽음을 바라보는 자세

나는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삶의 끝엔 죽음이 있고,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죽음이 발생하는 순간 지금의 삶과 단절이므로, 지금의 삶 속에서는 죽음을 미리 체험할 수 없다. 그래서 두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신비롭기까지 하다.


세상 모든 만물의 이치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물음 아래 인간은 초월적인 능력을 발휘, 현대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고, 지금도 여전히 발전하고 있으나 생명의 탄생과 죽음에 대해서는 어느 것 하나, ‘신비’란 단어의 개입없이 논리적으로 납득할 만한 이론은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


인간만이 죽는 것이 아니고, 개미도 죽고, 날아다니는 새도 죽고, 나무도 시들어 죽는다. 생명으로 존재한 것들 중 죽지 않는 것은 없는데,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에서 반복되는 그것들의 죽음이 여지껏 내 삶에 크게 와 닿으며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지는 않았었다. 자연스런 하늘의 섭리로 그저 자연스레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인간의 죽음은, 아직 가까운 이의 죽음을 직접 체험해본 적은 없으나, 죽은 사람은 더 이상 내 앞에 현존하지 않으므로, ‘죽었다’, ‘더 이상 이세상 사람이 아니다’ 라는 가짜 같은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며, 그러나 나에게는 결코 죽음이 닥치지 않을 것 같은 영화 같은 신화를 마음 속에 무의식적으로 전제하며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런데 영화 같은 불사의 신화는 없다.

나는 죽을 테고, 내 주위 사람들도 죽겠지.



내가 존재하면 나의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의 죽음이 존재하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죽음은 나와 전혀 상관이 없다.


세상의 사람들 중 이렇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이런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태반일 것이다. 그러나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 이고 지금도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죽으면 끝나는 거라면, 그러면 우리는, 아니 나는 무엇을 향해 뛰어가고 있는가?

돈을 쫓고 명예를 쫓고,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린다 한들 그것들이 죽음 앞에서 내게 어떤 의미를 남겨 줄 것인가?



독일 철학가로 20세기 초반, 존재주의 철학과 종교 철학, 역사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한 칼 야스퍼스 (Karl Jaspers, 1883 ~ 1969)가 말했다. (그의 책 내용이 어려워 정확하게 그의 말을 서술하기는 힘들지만, 아래와 같이 정리해본다)



사건으로서의 죽음은
오직 타자의 죽음으로써 존재한다.
죽어가면서 나는 죽음을 겪지만
나는 결코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다.

내가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알고자 하지 않음으로,
죽어가면서 나의 절대적 무지 때문에 고통받는다.
죽음에 대한 질문은 삶과 죽음에서
내가 무엇인지 알게 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죽음에 직면해서 나의 삶을 이끌고 시험하려는
나에 대한 요청이다.


사람들은 죽음을 전제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지만, 그 끝의 순간, 죽음의 목전 앞에서 평화롭게 눈을 감지 못하고 후회와 상실감 아래 생을 끝내는 사람들도 많다고 들었다. 아마도 죽음 직전에서야 지금껏 놓치고 살아온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서이지 아닐까?

과연 그것들이 무엇일까? 삶 속에서는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건너뛰다가 죽음 앞에서 보이는 것들?


어떻게 죽느냐라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별개로, 내가 현재 생각할 수 있는 ‘죽음’이란, 아마도 잠을 자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 꿈 속에 머무는 것.

만약 내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고 가정하면 나는 어떨까? 죽음을 평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가장 먼저 가슴을 스친다.

미안함 그리고 아쉬움. 

부재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소명에 대한 아쉬움. 


엄마의 부재로 인해 자녀들이 겪게될 힘듦에 대한 미안함, 

그들의 성장을 함께 할 수 없음, 사랑을 나눌 수 없음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하지못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


이 미안함과 아쉬움으로 인해 나는 죽기 싫다는 것이 명백하게 가슴으로부터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살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 후회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현재 살아있는 나는 이것들을 내 삶의 최우선 가치로 두고, 이에 맞춰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임이 너무 분명해진다.


이래서 야스퍼스가 말한거구나.


죽음은 실존의 거울이 된다


과거를 회상하면 과거가 현재로 돌아오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 역시, 미래가 현재의 내 앞에 펼쳐지는 것으로, 죽음을 생각하면, 혼란스러운 현실 속, 내가 중점을 두어야 할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명확히 보이면서, 내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안내된다.


그런데 문득, 과연 나의 죽음이 어떤 큰 의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도 머리에 스친다.

우주라는 큰 세상 아래 지구라는 행성에서 수억만명의 사람들 중 하나인 나의 존재가 죽는다는 의미가, 내 발 밑의 개미 한 마리 죽는 것과 뭐가 그리 다를까? 죽음 자체로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자연적인 것, 개미의 죽음과 별반 다를 것이 무엇인가.



그런데 반면,

나의 가족이, 나보다 소중한 나의 자식이, 자연 순응의 법칙을 거슬러, 한순간 사라지는 가정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생각만으로도 느껴지는 크나큰 아픔이다. 나의 죽음 앞에선, 내 죽음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했는데,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아픔과 고통.

이것은 아마도,

그들의 죽음 역시 수억만명 인구 중 한사람의 뻔한 죽음이지만, 그들의 존재는 내게 굉장히 큰 삶의 의미이기에, 그것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즉, 살아야 할 이유 중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므로.


그들의 죽음 이후에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본능적인 자기 보호본능, 생존의 본능 아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며 또 꾸역꾸역 살아는 가겠지.


어느정도 자연의 법칙에 순응된 죽음은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음을, 그러나 황망하게 떠나버리는 죽음 아래에서는 삶의 의미에 대한 질서가 무너져버릴 듯한 두려움, 그리고 지금의 상상을 통해, 내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 ‘사랑’ 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깨닫는다.


죽음을 생각하면, 인간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인간이 컨트롤 하며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손에 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니, 또 이러다가 까먹고 세속적인 것들에 기대어 살아갈 수 있겠다만,

가끔씩 이런 진지한 성찰을 통해, 좀 더 의미있게 살아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함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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