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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gabond Mar 29. 2023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나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본질을 파악하며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고자, 즉, 사회가 원하는 것이 아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 나서는 삶.

그리고,

후회를 할까 겁이 나서 못하는 것보다 후회의 가능성을 감당하면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뿐인 인생을 대하는 올바른 삶의 자세라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이 자주 엄습한다. 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을까? 과연 잘 할 수 있을까? 올바른 결정인 것일까? 나중에 후회 없을까?


쉬운 일이나 어려운 일이나, 처음은, 생소함을 마주하는 것은 항상 어려운 것 같다.


집 밖으로 나가 놀이터에서 아이들 친구 엄마들과 인사하고 사귀는 것도 어려웠고, 처음 수영학원에 가서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물장구를 치며 수영을 배우는 것도 어려웠다.

회사를 그만두고, 갑자기 사라진 정체성과 마주하는 것도 어려웠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가장 익숙했던 회사로 다시 들어가야 하나 고민을 또 수천번 한 걸 보면, ‘익숙하다’는 상태가 우리 삶에 주는 안정감이 우리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불안함과 두려움은 생소함과 마주하며 생기는 것이고, 처음에는 생소함과 어려움을 헷갈릴 수 있을 것 같다. 생소하기에 더 어렵다 느껴지는 것이고, 익숙해질수록 쉬워지는 것.




평생 숫자만 보고 분석하는 일을 하던 내가, 갑자기 ‘철학’을 배우니 어려운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1페이지를 1시간 내내 보고 있어도 무슨 내용인지 해석이 안되는 당연한 상황 속에서 머릿속을 순간 스치는 이 생각들. 이 길을 가는게 과연 맞나. 다시 회사로 들어가 돈이나 벌어야 하나.

퇴사하고 나서 자주 만나는 생각들이다.


항상 모든 것의 ‘처음’ 인 지점에서 난 “어려움”을 회피하려는 나의 본능적 욕구와 만나고, 또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함과 두려움 속에서 현실로의 도피 같은 생각을 하며 나 스스로를 위안한다.


철학상담, 해석학 강의 내용 중, 철학자 중 한명이 신에 대해 언급하길 “우리는 신에 대해 해석하고, 해석하고, 해석하고, 끝없이 해석해야 한다”. 라는 발언을 했다고 하는데, 뇌리에 꽂혔다.


인간의 능력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신에 대해 끝없이 연구하며 해석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갇히게 된다는 말인데, 이것은 우리의 인생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나와 세상, 혹은 그 무엇인가 알고자 탐구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지식과 내가 경험한 좁은 길의 풍경만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며 예측하려 할 것이고,

변화하려 노력하지 않는다면, 우리 인생은 현재까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갇혀 살게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인과론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퀴나스 등 고대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영혼이 있는가 등 인간을 철학적으로 탐구했고, 인간의 본성은 이성이며, 이성에 순응하며 사는 삶, 즉 사유하며 지성적인 능력을 발휘하며 사는 삶, 도덕적인 덕을 후천적으로 학습하고 습득하며 사는 삶을 공통적으로 강조하며 행복의 지향점으로 두었다는데,


그들의 말대로, 행복함을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시행되어야 하는 것은 진지한 사유를 통한 나와의 만남 아닐까.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


오늘 오전 철학연구 수업 내, 위 질문에 대한 대략적인 답을 찾은 것 같다.


나의 새로운 선택으로 야기된 생소함은 나의 ‘실존’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것.

나 답게 사는 것. 내가 추구하는 바대로 살기 위한 결단과 행위를 할 때 나의 “실존” 이 드러나고, 그 안에는 두려움과 떨림이 있을 수밖에 없단다. 그 과정안에 확고한 확신이 있는가? 있을 수도 있으나 없을 수도 있으며, 후회할 수 있는 위험성은 항상 존재하다. 그러나 진지한 나를 찾으러 가는 과정의 길, 모험의 길. 그 길 아래 책임은 온전히 나의 것.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모험적인 삶을 살지 않을 이유도 없다.

다시 한번 각성해보자. 난 오직 편안함과 안전성만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이 내게 충만함을 주지 못해 퇴사를 결심했고, 지금 충만함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했지.


삶 안에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많은 것들을 선택하고 행하고, 안도와 후회를 거듭 반복하며 산다.  그리고 그 과정 안, 사사로운 일들 앞에서는 굉장히 대담한 한편, 인생의 중요 선택에 있어서 굉장히 주춤하며 몸을 사린다. 잘못 선택하면 마치 큰 일이 날 것처럼.


익숙함과 편안함을 마다하고, 불안 아래서 위험성 있는 모험을 하는 삶이 과연 절대적으로 좋은가. 이에 100%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만, 이 실존에 대한 판단은 각자에게 있는 것 같다. 상대방이, 남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나는 내 삶에 만족하는가? 나 답게 살고 있는가? 무엇을 추구하고 싶은가? 무엇이 두려운가? 여기서부터 출발해보면 될 듯하다.


학교를 다니며, 내가 정말 무지하구나를 깨닫는다.


대학 시절의 알량한 간판을 가지고, 15년 대기업 회사 경력을 가지고, 그 무리의 집단 아래서 어느 정도의 자부심을 가지며 살아왔는데, 그 간판과 이력서가 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이었던 점 이외에, 내세울 만한 것이 없구나. 난 정말 우물안에 개구리였구나.


세상은 넓고, 배울 것은 많구나. 세상을 겸손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늘었네.

이렇게 조금씩 나를 찾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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